신유박해편
5년후인 2001년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2백주년을 맞게 된다. 주문모 신부, 강완숙 골롬바를 비롯,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초기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첫 피를 뿌린지 2백여 년, 아직도 이들은 시복시성의 영광을 입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순교 1백50주년이자 최양업 신부 탄생 1백75주년인 올해 본보는 제2의 시복시성을 위한 특별기획으로 신 순교혈사(新 殉敎血史)를시작한다.
신 순교혈사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초기 순교자들을 비롯,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운동을 촉구하기 위한 시도. 본보는 지난 75년 당시 순교복자 79위ㆍ 시복 50주년을 기념하고 시성을 향한 염원속에 순교자들의 신앙과 생애를 중심으로 「순교혈사」를 연재한 바 있다.
한국 교회사 전문가들의 집필과 도움을 받아 연재될 「신 순교혈사」를 통해 본보는 한국 천주교회 제2의 시복시성 운동의 지평을 열어갈 계획이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년)는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로 6년 4개월여 간 선교활동을 하다 신유박해때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성직자가 없던 한국 천주교회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비로소 완전한 형태의 교회로 우뚝설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주 신부의 입국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 소주(蘇州) 곤산현(崑山縣)에서 1752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그의 포르투갈식 성명은 「야코보 벨로조」(Jacobo Velloso)였다.
7살 때 모친을 여의고 8세 때 상부(喪父)해 고아가 된 주문모는 고모에게서 양육받았다. 그의 고모는 낮에는 침수(鍼繡)로 생계를 잇고, 밤에는 주문모에게 문자를 가르쳤다.
북경신학교 졸업
주문모는 20세에 결혼을 했지만 3년만에 상처(喪妻)한 후 다시 결혼을 않고 과거를 준비했으나 급제를 못하자 포기하고, 북경 신학교에 입학 제1회 졸업생이 됐다.
1791년부터 1794년 사이의 어느 때에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은 주문모 신부는 오 요한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의 사망에 따라 그의 후임으로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로 간택됐다.
주 신부는 그의 나이 42세 때인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의주 변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황(사바)을 비롯한 조선인 신자들의 안내로 조선 복장으로 갈아입고 동지사행이 환국하던 1794년 12월3일(양력 1795.1.3)의주에 잠입했다. 의주에서 주 신부는 마부로 가장, 12일동안 걸은 후 12월14일 서울에 들어왔다.
주문모 신부의 영입에 직접 참여했던 신자들은 지황, 최인길, 강완숙, 윤유일, 배 마티아 등이다.
서울에 도착한 후 서울 북촌 최인길의 집에서 최초로 성사를 집전한 주문모 신부는 신입교우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고, 이 기회를 이용해 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지방의 공동체를 돌며 전교 활동을 계속했다.
1795년 이후 1801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4회에 걸쳐 지방으로 피신한 주문모 신부는 입국 직전 4천명으로 추계되고 있던 신자 수를 1만여 명으로 성장시켰다.
주문모 신부는 박해의 와중에도 새로운 회장제인 「명도회」를 조직, 발족시켜 회장에 정약종을 임명하는가 하면 황사영, 홍필주, 현계흠, 홍익만 등을 명도회의 하부조직인 육회(六會)의 책임자로 두어 교회 조직을 유지, 발전시키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 강완숙을 여회장에 임명, 여교우들의 신앙 활성화를 도모하는 한편 폐궁에 살고 있던 은언군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를 입교시키기도 했다.
저술활동도 왕성
주 신부는 바쁜 사목 일정 중에도 교리서, 신심서 저술 활동을 벌여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라는 고해 지침서를 저술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까지 도피했다가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신자가 고통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로 다시 돌아와 3월12일 관청에 자수, 의금부로 이송된 후 4월19일(양력 5월31일)새남터에서 효수형을 받고 50세 나이로 순교했다.
순교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높이 달려 있었고 시신은 강바닥 모래사장에 닷새동안 방치돼 있다가 군졸들이 지키기 귀찮아 어디론가 몰래 갖다 묻어 버려 지금도 시신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순교 전에 『향후 30년 후에야 조선에 신부님이 다시 들어올 수 있게 되리라』고 예언했는데 그의 예언이 적중, 32년 후에 한국 천주교회는 새 선교사를 맞아 들일 수 있었다.
현재 주문모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해 수원교구(교구장=김남수 주교)가 교황청에 청원 작업중에 있으며, 이천성지에 윤유일 동상과 함께 주문모 신부의 동상이 유일하게 세워져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