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신앙과 기도에 대한 질문 속에서 특이한 갈등을 체험한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등지고 살거나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면에 사람들은 하느님의「부재」에서 오는 어려움을 느끼지만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을 찾는다. 현대인들은 기도하기를 거부하거나 더 이상 기도하지 않으려는 반면에 기도하기를 갈망하고 또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다. 바쁘고 복잡한 생활 속에서도 많은 이가 고요, 침묵, 고독, 명상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에 대한 강론이나 강의를 자주 들어왔었고 때로는 기도에 대한 좋은 책들도 읽었다. 성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신앙인은 누구나 기도를 매일 밥 먹듯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한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면 기도의 어려움은 무엇이며, 기도는 왜 필요한가?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여 왔는가? 기도란 약한 자, 고통받는 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만이 필요로 하는 것일까?
▨ 기도의 어려움 및 극복
기도의 어려움은 어떤 것들인가?
① 숨어 계시는 하느님
우리는 하느님을 육체를 가지고 응답하는 분으로 체험하지 않는다. 기도는「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한다. 무신론자들만이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 역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내 하느님, 진종일 당신 이름 불러 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나이다』(시편 21). 이외에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말,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시편 10)고 하는 이가 있다.
기도하는 이는 누구나, 성인들까지도 이 같은 하느님의 부재의 어려움을 체험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감추시는 신비를 설명하려는 일은 외람된 일이다. 이 신비는 언제나 기도하는 이에게 수수께끼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감추시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때때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인간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이 감추임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을 감추시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거나 찾을 때마다 하느님이 즉시 응답하시거나 나타내 보이신다면 우리 인간은 오히려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고 자유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억지로 인정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강제성은 모든 통교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부재중에서 하느님의 강한 현존을, △침묵 중에서 하느님의 힘찬 웅변을, △어둠속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찾고 발견하게 한다.
우리는 곧잘 하느님을 내가 상상하고 있는 하느님을,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나를 위한 하느님을 만들거나 찾는다. 그러나 하느님은「감추임」속에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감추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은 당신을 감추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이웃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인간 예수를 통해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모일 때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보잘것 없는 형제에게 선을 베풀 때 그것은 바로 당신께 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8, 20: 25, 40참조).
② 기도의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기도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기도하기를 그만두는 이가 있다. 기도를 하지만 어려운 현실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삶의 강한 힘과 불투명함이 때로는 우리를 무능하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는 단념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인간은 계획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바라신다. 한 치의 앞을 미리 내다 볼 수 없는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눈에 보시기에 우리의 구원과 행복에 불필요하거나 해로운 것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녀가 어떤 해로운 것을 청한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청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이고, 주지 않음은 바로 자녀의 청을 들어준 것이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필요한 바를 꾸준히 인내하며 간청해야 한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비록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더욱 적절한 시기에 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관철시키고 자기 힘으로 남을 변화시키려고 극구 애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도 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가? 우리 기도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하여 기도를 중단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구체적인 삶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우리가 삶에 지쳐있다는 표시일수도 있다.『나는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다』라고 말할 만큼 우리가 지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표시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를 거부하는 교활한 핑계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구원을 원하는 마음과 구원을 원하지 않는 마음이 동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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