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남편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다른 하느님의 종과는 달리 아내로부터 신앙을 듣고 배운 순교자가 있다. 하느님의 종 124위에 오른 정찬문(안토니오)이다.
1822년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먼저 세례를 받고 입교한 아내로부터 41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천주교 신앙을 듣게 됐다.
늦게 눈을 뜬 신앙이었지만 정찬문은 아내와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고, 전교활동에 충실했으며, 3년 동안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는 등 신앙을 갈고 닦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그 또한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옥으로 끌려갔다.
당시 정찬문의 일가 친척과 평소 알고 지내던 지방 하급관리가 찾아와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동안 그의 가산은 압수되고, 가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져만 갔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아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다가 옥으로 가져가 남편에게 넣어주고는 했다.
어느 날 정찬문은 여느 때처럼 또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가혹한 고문과 무수히 많은 매를 맞게 됐다. 계속되는 배교의 요청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옥으로 들어가, 그날 밤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67년 1월 25일,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정찬문이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으며, 이후 그의 조카들이 머리없이 몸체만 수습해와 고향 인근에서 장사를 지냈다. 후대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그때까지도 그의 몸이 굳지 않아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현재 정찬문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 무덤이 경남 진주시 사봉면에 있으며, 이 무덤은 발견되기 전까지 허유고개 길섶에 초라한 모습으로 위치한 채,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는 뜻인 ‘무두묘(無頭墓)’라고 불리어 왔다.
1948년 5월,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를 발굴해 위쪽으로 이장했으며 기념비를 세웠고 이후 마산교구 사봉공소의 순교자묘역으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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