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 경제의 미래는 물론 우리가 열어갈 미래를 내다보게 해주는 가늠자일 뿐 아니라 시금석이다.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가 FTA와 관련해 사목자적 고뇌와 예언자적 판단을 담은 기고문을 보내왔다. 가톨릭신문은 2회에 걸쳐 강 주교의 기고문을 요약 소개한다.
1. 우리나라가 산으로 가는가, 바다로 가는가
지난해 말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곧 발효를 앞두고 있는데 이제는 중국과도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을 준비에 착수한다고 해 뜻있는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우리나라 앞날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FTA는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부작용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각 분야에 돌이키기 어려운 재앙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들이다.
외교통상부가 인터넷에 게재한 한·미 FTA 협정문을 살펴보니 한글판만 무려 700쪽이 훨씬 넘는다. 영문까지 합하면 1500쪽에 달한다. 본문과 부속서가 별도로 나뉘어 있어 협정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쉽지 않다. 이 사안이 우리 미래를 크게 좌우하는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내용인지라, 팔짱끼고 맥 놓고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오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국민들도 경제에 대해 공부를 하고 정치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압박을 가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산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1월 25일부터 스위스 다보스에서는 42회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열렸다. 세계 상위 1%들이 참석해 온 이 포럼은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을 깃발처럼 내세워왔다. 올해는 개막 전날인 24일 이 포럼의 수장격인 클라우스 슈바프 제네바대학 교수가 “(자본주의 행태에 대해) 반성한다”는 사과의 뜻을 밝히는 등 포럼 본래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겠다는 뜻이 강하게 드러났다. 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언급하며 서구식 자본주의는 한계를 드러냈으며 당장 경제모델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자본주의를 가장 옹호하던 이들이 그 결함과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대표적 총아인 FTA에 우리 미래를 송두리째 맡기려고 하는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인지 국민 모두가 깨어 살펴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 자유무역협정(FTA)이란
자유무역협정(FTA)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에 장애가 되는 모든 종류의 관세나 규제를 없애고 자유롭게 교역을 추진하자는 협정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칠레, EU, 싱가포르, 페루, 인도 등과 FTA를 맺었고, 미국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캐나다와 멕시코, 호주 등 여러 나라와 FTA를 체결하고 있다. 국제교역에 있어서 국가 간의 관세나 규제를 없애고 좀 더 자유로운 교역을 촉진하려는 흐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세계 경제의 추세다. FTA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간의 경제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국제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첫걸음이 시작됐다.
이러한 취지로 194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23개국 참여로 출범한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체제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에 이르기까지 8차례 단계의 협정을 거치며 무형의 협정체제로 계속되었으나, 1995년에 이르러서는 ‘협정’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세계무역기구(WTO)를 창설하면서 국제경제분야에 있어서 준사법적인 강제력을 동원하는 상설 국제무역기구 체제로 탈바꿈했다.
3. 국가 간 무역협정의 탄생 경과
- GATT 탄생의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상자와 피해를 가져왔고 그 참극을 경험한 열강은 전쟁의 원인이 각국의 보호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갈등에 있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다시 이러한 전쟁의 참극을 재연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 간의 무역장벽을 허물고 원활한 교역과 교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고 이를 위한 국가 간의 무역협정(GATT)을 출범시키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GATT의 출발은 세계가 전쟁을 피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자는 좋은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 FTA 탄생의 배경
GATT 체제는 처음에는 세계무역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모든 요인을 없애기 위하여 관세율을 인하하고 수입제한을 폐지하며 회원국 사이에서 서로 최혜국대우 원칙을 준수하여 세계 경제의 안정적인 발전을 꾀하자는 선진국 중심의 무역협정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협정만으로는 강제력이 동반되지 않으며 회원국 전원이 찬동하지 않으면 효력이 발생하지 않아 한계가 있었다. 이에 분쟁해결을 위해 좀 더 힘이 있는 상설기구의 설립이 요청되었고 GATT 회원국들은 국가 간 무역분쟁을 조정하는 준사법적인 국제무역기구로 WTO를 출범시키게 됐다. 다만 WTO는 GATT보다 좀 더 실제적인 효력을 갖는 국제기구가 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여러 국가들 간의 총체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에 미국을 필두로 몇몇 나라는 WTO같은 다자간 협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수의 나라들끼리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협정국 사이에서는 가능한 한 모든 규제와 장벽을 철폐하고 효과적인 자유무역 실현으로 경제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FTA는 둘 또는 그 이상의 나라들이 상호간에 관세와 시장점유율 제한 등의 무역장벽을 제거하기로 약정하는 조약이다. 그뿐 아니라 FTA는 해당 국가 간의 자유로운 무역을 위해 단순한 관세인하나 상품의 수입제한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들의 경제를 구조적으로 통합하고 모든 종류의 상품, 비상품(서비스, 지적재산권 등)과 모든 경제활동이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수행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FTA는 원론적으로는 국가 간의 보호무역 장벽을 치우고 국가 간 갈등의 요인을 제거하자는 GATT의 목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선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 신자유주의 토양
GATT에서 WTO로, 그리고 다시 FTA로 이어지는 세계 교역 자유화의 배경에는 경제를 활성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국가와 정부의 개입이나 규제를 최대한 완화하고, 시장이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자유롭게 기능하도록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자유주의 경제관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자유주의 경제관을 한 단계 더 나아가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 시장에 확대 적용한 것이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 토양을 세계적으로 확산한 것은 IMF, 세계은행, WTO, OECD같은 국제기구들이었다.
원래 IMF는 국제수지가 위기 상황에 처한 나라들이 디플레이션 정책을 사용하지 않고도 국제수지 적자를 줄일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됐다. 또 공식 명칭이 ‘재건과 발전을 위한 국제은행’인 세계은행은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 국가들의 재건 및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나라들의 경제 발전을 돕기 위해 설립됐다. 즉 세계은행은 (도로나 다리, 댐과 같은) 사회기반 시설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제공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재건과 발전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제3세계 외채 위기가 있었던 1982년 이후 IMF와 세계은행은 이른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정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사회기본시설 개발의 지원이라는 본래 임무에서 훨씬 벗어나 정부 예산, 산업 규제, 농산물 가격, 노동시장 규제, 민영화 등 개발도상국들의 거의 모든 경제정책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IMF와 세계은행은 차관 제공에 조건을 붙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차관을 받는 나라의 민주주의, 정부의 분권화, 중앙은행의 독립은 물론 기업의 지배구조와 같은 사회 제반영역에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
IMF의 경우 처음에는 통화 평가절하 등 채무국의 국제수지 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항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차츰 예산 적자가 국제수지 불안의 핵심적인 요인이라는 근거에서 정부 예산과 관련한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국영기업에서 발생한 손실이 예산 적자의 주요한 요인이라는 근거에서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같은 조건까지 내걸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거론되고 또 실행에 옮겨지고 있는 공기업의 민영화가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제관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 지난해 11월 가톨릭·원불교·천도교·개신교·불교 등 5대 종단 성직자들로 구성된 종교환경회의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미 FTA 졸속 비준에 반대하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한·미 FTA가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을 고려하지 않은 반복음적 협정이라고 역설했다.
4. FTA 사례와 징후
- 멕시코
미국은 WTO체제로는 회원국 전원이 합의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교역 활성화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소수 국가 사이의 양자 간 협정인 FTA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고 제일 먼저 멕시코와 캐나다와 북미주의 FTA를 맺는다. 멕시코의 경우 나프타(NAFTA) 발효 이후 최대 시장인 미국으로의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미국 및 유럽 기업들의 직접투자가 큰 폭으로 늘어나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았다.
한·미 FTA를 맺을 때 우리 정부가 국민들에게 제일 앞세운 논리는 세계 제1의 시장인 미국에 우리 기업들이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멕시코의 경우도 바로 그런 의도로 FTA에 접근했다. 미국과 FTA를 맺음으로써 멕시코의 수출규모는 나프타 직전인 1993년 518억 달러에서 2005년에는 2127억 달러로 4배 증가했다. 나프타 발효 후 관세감축 등의 효과로 멕시코와 미국의 상품교역은 약 186% 증가했으며, 특히 수출증가율이 수입증가율을 웃돌아 대미 무역수지가 1993년 20억 달러 적자에서 2005년 650억 달러 흑자로 돌아섰다. 외국인 직접투자 역시 1993년 44억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2004년 166억 달러, 2005년 178억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외환 보유고도 687억 달러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외형적으로 수출과 투자가 증가하는데도 멕시코의 노동자·농민의 생활은 갈수록 악화됐다. 심각한 양극화로 인한 빈곤층의 증가, 저성장, 이농현상, 초국적 기업의 지배력 강화, 불법이민의 증가, 마약밀수 등 심각한 폐해가 드러났다. 나프타 발표 이전보다 4배 이상 증가한 전체 수출에서 미국시장 비중이 85~90%를 차지하였고, 수입품의 85%는 미국에서 들어왔다. 즉 멕시코는 미국시장을 위한 노동집약 생산기지로 변한 것이었다. 멕시코 기업은 수출 1위부터 6위까지 국영석유회사 하나밖에 없고 다 미국계 기업이었다. 미국기업들은 자기네 부품을 타지역에서 멕시코로 수입해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조립하고 수출이란 이름으로 가져갔다. 그런 의미에서 2005년 대미 무역수지 흑자 650억 달러는 멕시코에 진출한 미국의 초국적기업이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이는 멕시코가 초국적기업들의 글로벌 생산기지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프타 이후 멕시코 노동자들의 평균 실질임금은 떨어졌다. 나프타 발효 후 2005년 말까지 멕시코 제조업의 평균 노동생산성은 68%나 증가했는데도 노동비용은 31% 감소했다. 기업의 이윤은 크게 늘었지만 노동자 몫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멕시코 중앙은행이 집계한 연도별 1인당 GDP 증가율을 보면, 1994년 이후 2005년까지 연평균 1.43% 성장에 그쳤다. OECD평균 GDP를 100으로 봤을 때는 1990년에 37.7에서 2002년 35.7로 오히려 하락했다.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고질적인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생활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멕시코의 저성장 원인은 나프타 이후 멕시코 내부의 산업연관 체계가 무너진 데 있다. 대기업과 외국 기업들의 수출이 성장을 이끌고 있지만, 이들은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만 활용할 뿐 대부분의 원·부자재와 부품을 중국 등 멕시코 이외 지역에서 들여온다.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내수제조업, 중소기업, 농업 등에서 대규모 도산사태가 이어지는 동안 무역의 대미의존도는 85~90%로 치솟고 금융업의 90% 이상이 외국인 손에 넘어갔다.
실제로 멕시코 정부는 나프타 발효 뒤 2002년까지 50여 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농업부문에서 13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 기간 내수 위주의 중소기업, 도시 자영업, 농민 등 개방에 취약한 계층들은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렸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경제의 침체로 제조업의 고용창출 능력도 떨어졌다. 멕시코 정부의 공식통계로도 2005년도 신규취업자 10명 가운데 7명이 비정규직이다. 절대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인구도 전체의 31%에 이른다. 멕시코의 경우 나프타는 외형적 경제수치로는 성장을 가져왔지만, 그 수치는 속 빈 강정이었고 국민의 삶의 질은 나락으로 떨어뜨린 셈이다.
- 캐나다
캐나다는 나프타 체결 전인 1989년에 이미 미국과 CUFTA(쿠프타)를 체결했다. 이 쿠프타 이후 캐나다 산업 전반이 구조 조정되면서 비정규직과 비공식노동이 꾸준히 증가했고, 실업률은 7.8%에서 11%로 높아졌다. 사회복지 지출은 1993년에는 21.6%였다가 2001년에는 17.8%로 떨어졌다. 쿠프타 발효 후 캐나다 정부는 실업급여, 노후연금, 의료 및 교육재정을 대폭 삭감했다.
캐나다 농가부채는 1989년 225억 달러에서 2001년 442억 달러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1988년 이후 2002년까지 5만 명의 캐나다 농부들이 일자리를 잃고 고향을 등졌다. 캐나다에서 쿠프타와 나프타가 발효되면서 11%의 가족농이 농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사스카츈, 알버타, 매니토바풀스, 곡류생산자연합 등 캐나다의 4개 주요 협동조합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아처다니엘스가 높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아그리코어유나이티드로 통합 합병되었다. 사스카츈휘트풀과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카길이 서부지역 곡물의 75%를 통제하고 있고 아처다니엘스는 캐나다 밀가루 제조시설의 50%에 달하는 지배권을 갖고 있다. 콘아그라는 캐나다 맥아제분 공장의 64%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카길과 육류가공업체인 IBP는 캐나다 전체 육류포장공장의 2/3를 소유하고 있다.
- 볼리비아
볼리비아는 외채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IMF는 1999년, 1억3800만 달러의 융자를 결정하고 대신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 중에 공기업을 매각하라는 내용이 있었고, 여기에는 코차밤바 지역의 상하수도 시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같은 해 세계은행은 볼리비아가 구조개혁을 완수하려면 확실한 재정 지출 삭감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코차밤바 상하수도 시설에 대한 일체의 보조금을 없애야 한다고 권고했다.
엄청난 압력 속에 볼리비아 정부는 결국 코차밤바의 상하수도 시설을 매각하기로 하고 입찰을 개시하였다. 이 입찰에 뛰어든 회사는 ‘아구아스 델 투나리’ 하나뿐이었고, 결국 2만 달러도 채 안 되는 헐값에 상하수도 시설권이 이 회사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 회사는 벡텔이 100% 소유한 자회사인 IWL(International Water Limited)가 55%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벡텔의 손자회사라고 할 수 있었다.
벡텔은 상하수도 시설 운영권을 따낸 지 단 1주일 만에 수돗물 가격을 급격하게 인상했다. 당시 볼리비아의 최저 임금은 월 70달러 정도였는데, 한 달 물값이 20달러를 넘게 되었다. 다음 해 2000년 2월 상하수도 사유화를 취소하고 벡텔의 시설 운영권을 빼앗을 것을 요구하는 대중봉기가 일어나 시내 전체가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볼리비아 정부는 4월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4월 10일 정부는 민중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서약했다. 벡텔도 상하수도 운영권을 빼앗기고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이에 벡텔은 1992년 네덜란드와 볼리비아가 맺은 양자간 투자협정의 ISD(투자자-국가직접소송제)를 근거로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볼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2600만 달러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벡텔과 자회사가 볼리비아에 지출한 내용은 100만 달러가 채 안 된다. 〈계속〉
▤ 강우일 주교는…
지난 2008년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주교회의를 이끌고 있는 강우일 주교는 취임 첫 마디로 생명과 환경 문제를 꼽을 정도로 창조보전 활동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목자다. 한때 환경오염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명동 집무실까지 걸어 다닌 일화를 남기기도.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74년 사제품을 받은 강 주교는 85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면서 사목 비전 창출에 힘을 쏟아온 사목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사무총장을 맡아 대회 기본 정신인 ‘한마음한몸운동’을 교회의 내적 성숙으로 이어지도록 하는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 1992년 소공동체운동을 도입해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에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2002년 7월 제4대 제주교구장에 임명된 강 주교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 제주교구를 어느 지역교회 못지 않은 역동적인 곳으로 일궈나가고 있다.
주교회의 의장으로 발걸음을 한 4대강 공사현장,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현장 등 교회 안팎에 남긴 족적들은 그의 사목적 비전에 바탕한 예언자적 선택의 길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