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초대신부인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및 병인순교 130주년을 기념한 「병인박해 연구 학술 강연회」가 4월12일 오전 10시 수원교구 죽산 순교자 기념성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학술 발표회는 수원교구 남부지구(지구장=김화태 신부) 사제단이 주최하고 수원교구, 한국 교회사 연구소, 영남과 호남 및 부산 교회사 연구소, 한국 그리스도사상 연구소,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 가톨릭신문사 등이 후원했다.
특히 이날 학술 발표회는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과 병인박해 130주년을 기해 한국교회의 시복시성 운동 및 순교자 현양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아울러 한국 순교자 1만여 명 중 7천여 명이 순교한 병인대박해의 교회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마련됐다. 수원교구 최덕기 부주교를 비롯한 교구 사제단과 교회사 연구 관계자, 각 본당 총회장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이날 학술 강연회는 김화태 신부의 사회로 오후 5시까지 진행됐다.
병인박해와 관련된 총 6개의 관련 논문이 발표된 이날 학술 연구 발표회에서는 수원 가톨릭대학교 하성래 교수의 기조강연을 비롯 수원가대 이정운 신부의 「신앙의 증거, 순교사적 개발의 의의, 그리고 우리의 각성」, 호남 교회사 연구소 박대길 연구원의 「호남지방에서의 병인박해 진행과 무명 순교자들에 관하여」등이 각각 발표됐다.
한편 수원교구 김남수 주교는 『한국교회사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을 내었지만 불과 103위의 순교자들만 성인반열에 오르고 다른 순교자들은 시복과 시성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은 우리가 그들의 사적을 찾지 못하고 그 증거를 확실하게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학술 연구 발표회 등을 계기로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운동과 현양운동이 더욱 활기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기조강연/하성래 교수ㆍ수원 가톨릭대
올해는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이며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130주년이 되는 해이며 아울러 2천년의 대희년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런 뜻 깊은 해를 맞아 수원교구 남부지구 사제단 주최로 병인박해 연구 학술 발표회를 개최하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린다. 흔히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한국교회사에서는 4대 박해라 한다. 그 4대 박해 중에서도 병인박해는 가장 처절한 박해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날 당시 천주교 신자의 총수는 2만3천여 명, 그 중 1866년부터 신미양요가 일어난 1871년까지 순교한 분들이 8천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병인박해로 순교한 순교자 중 24위가 시성되어 전 세계 천주교인들의 기림을 받고 있고 무명 순교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병인박해의 대 소용돌이가 있은지 130년이 지났지만 그 많은 순교자들의 역사적 기록들도 여기 저기 흩어져 하나로 종합 정리돼 있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 정리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병인박해 순교사가 새로 집필돼야 할 단계에 와 있다. 아울러 병인박해는 물론 신유박해 정해박해, 그 밖의 여러 박해를 통해 훌륭하게 순교한 순교자들의 사적을 조사, 정리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줌은 물론 시복수속이 이뤄지도록 교회의 힘을 결집해야 한다.
◉ 호남의 병인박해 진행과 무명 순교자들에 관하여/박대길 연구원ㆍ호남 교회사 연구소
병인대박해는 1866년 2월23일, 베르뇌 주교와 남종삼, 홍봉주 등을 체포하면서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 실각 때까지 만7년여 동안 지속된 박해로 규모에 있어서나 가혹함과 희생자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8천 내지 1만여 명의 순교자를 낸 병인대박해의 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기해박해 이후 재건되었던 모든 인적 물적 터전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신도들의 신앙은 순교의 피로 더욱 피어나 신앙을 고수하며 지켰다. 그리고 1876년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자 교회 재건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의 여파는 계속되어 1886년에는 한불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도 여러 명이 순교하는 박해를 맞기도 했다. 병인대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전라도 역시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는 박해기간 동안 또는 박해가 수그러들었을 때 전국에 있는 신도들의 피난지가 되었다.
전라도는 한국 천주교회가 조선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박해를 처음으로 받았던 곳이고 1801년 박해 때에는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대박청래」사건과 관련하여 대역부도죄와 동참죄, 그리고 불고지죄로 능지처참형과 참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크고 작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들을 낳았던 곳이다. 이에 따라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와 처벌은 어느 지역보다 팽배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병인박해와 충청남도 순교자에 대한 연구/차기진 박사ㆍ한국 교회사 연구소 연구실장
충청남도의 순교자는 1792년 12월에 원시장이 옥사한 이후 꾸준히 이어지게 됐으며 이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볼 때 1801년 무렵에는 1만 명의 신자 중에서 약 17.9%에 해당하는 1천7백여 명이 충청남도에 거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기록에 나타나는 1백24명의 신자들 중에서 양반, 중인 출신 신자들은 19.4%인 24명 뿐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하층민 위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충청남도의 병인박해는 1866년 3월11일에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전개되었다. 관찰사가 있던 공주 감영, 홍주 관아, 병마절도사가 있던 해미 등지에서 포졸들이 파견되었고 주로 이들 세 곳에서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이 기간 동안 신자들은 참수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가장 많은 숫자가 순교했고 남형에 속하는 생매장, 자리개질, 대들보 형틀 등에 의해서도 순교하게 되었다. 이렇게 순교한 충청남도의 순교자 수는 치명일기에서 총 8백77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박해로 인해 많은 배교자들이 탄생하기도 하였고 반면에 박해를 피해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신자들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새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현재 병인박해와 관련된 충청남도의 사적지로는 공주의 황새바위와 청양의 다락골, 해미성지, 보령 갈매못 등이 있다.
◉ 병인박해와 경상도지방의 순교자들/마백락 연구원ㆍ영남 교회사 연구소
경상도지방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6년 전인 이른바 경상도박해라고 하는 1860년의 경신박해때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를 하였고 특히 이 박해때 최양업 신부는 경남 간월산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을 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이 지역의 박해시작은 이미 병인박해 6년 전에 시작되어 그 후 1865년 가을에는 예천 건학과 부럭이에서 일어난 박해에 의해 전 사베리오와 이 시몬 등이 1866년 1월에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경상도지방에는 병인박해 1년 전부터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66년 2월의 병인 1차 박해에 이어 그해 9월, 영국 상선 오페르트의 출현으로 2차 병인박해가 시작됐다. 이때 경상도지역은 1차 박해 때 보다 더욱 박해가 심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또한 3차 박해는 오페르트의 세 번째 내한과 남영군의 묘 도굴사건으로 인해 발생, 해안지방인 부산과 울산, 김해, 그리고 칠곡 한티를 비롯한 전 지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를 했다.
이처럼 경상도지방은 17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복음의 씨가 떨어졌으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짙은 고장이어서 그 전파의 속도가 대단히 느렸고 복음전파 과정에서도 천주교와 심한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병인박해 이후에는 다른 지방보다도 신앙의 열성이 활발해서 마침내 1911년 조선교구가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나눠질 때 이곳 대구교구 설립의 밑거름이 됐다.
◉ 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에 대하여/김윤수 부제ㆍ한국 순교 복자수도회
한국교회는 교회사 초기부터 많은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교회의 자랑거리라는 차원을 벗어나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들이 그러한 순교자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하는 하나의 커다란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가 우리의 순교자들에게 보인 관심은 실로 미흡하다. 신자들의 생활과 유리된 교회 사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아니면 일시적인 공경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순교자들에 관계된 어떤 역사적 사실 자체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시적이며 외적인 공경이나 현양의 표현양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순교정신을 깊이 깨달아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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