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12월 1일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오로라를 련상하는
머 나먼 이곳까지
엇더케나 차저왔나
어린 몸에 무거운 짐
등에 업고 팔에 안고
다 달이 험한 길에
엇더케나 차저오나』
1928년 12월1일자 천주교회보에는 간도(間島)로부터 온 독자 권 베드루의 글 「회보(會報)야 엇더케 오나」가 독자글 형식으로 실렸다. 이보다 한달 앞선 11월1일자 천주교회보는 간도(間島) 지국 개설을 공시하고 있다. 지국장 김기언 베드루를 중심으로 2명의 기자와 사진기자 그리고 고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5명으로 구성된 간도지국은 간도 연길현 팔도구시에 주소를 둔 첫번째 해외 지국인 셈이었다.
천주교회보의 해외지국 설치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1928년 현재 불과 3만5천4백63명에 불과했던 당시 교세에서 볼 때도 그렇거니와 일제하 혼란스럽기만 한 정세속에서 볼 때 사진기자를 둔 해외지국 설치는 더욱 놀라운 소식이었다. 아울러 천주교회보의 간도지국 설치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또는 보다 인간답게 살아보기 위해 고국을 등져야 했던 당시 조선의 핍박한 현실을 대변해주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회보야 엇더케 오나」를 쓴 권 베드루는 미루어 보건대 간도지국의 재정 담당 겸 기자로 발령이 난 권오균 베드루와 동일 인물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단순한 이 글 속에는 천주교회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가득 담겨 있음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회보에 대한 해외 동포들의 따뜻한 사랑은 창간 한 돌을 맞이한 28년 4월1일자 경도(京都) 독자 최 아오스딩의 글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돌을 마지하는 회보야」로 시작되는 이 글은 고국(교회)소식에 목마른 해외 동포신자들에게 하나의 샘물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천주교회보의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해주고 있다.
『멀고 먼 이곳까지 다달이 잊지안코 고국소식을 전하는 우리 텬주교회보야, 네가 벌서 돌이 되엿구나. 네가 한 살 더 먹은만큼 너의 몸도 배가 커젓구나. (중략) 놀랍도다 너의 활약이여 이후로도 부대 열성내어 소식 만이 전하여 주렴으나』
이 글에서처럼 천주교회보는 창간 1주년을 기해 그 크기를 배로 확장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지면이 배로 커진만큼 천주교회보는 다양한 지방교회 소식들과 사진을 게재하면서 신문으로서의 변신을 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지면확장 안내를 통해 선언한 것처럼 지면쇄신이라는 새로운 선택으로 시대적 흐름에 입맞추려 했던 천주교회보. 천주교회보의 이 같은 선택은 통신시설의 엄청난 개혁과 발전을 등에 업고도 구태의 그늘에서 편하고자 꾀를 부리는 새까만 후배들에게 무언의 교훈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뿐인가. 당시 천주교회보에는 창간 1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병행해 써오던 국한문 혼용을 가능한 한 한글 전용으로 변신하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물론 이 같은 모습들은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천주교회보가 한국 국어발전사에 끼친 공로라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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