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아직 수도원이 들어오지 않았던 박해시대에도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선조들 가운데서는 동정을 지키며 공동체 생활을 하거나 동정부부로 일생을 살아간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모두 교리를 실천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려는 목적에서 동정생활을 택하였다. 그 중 윤점혜(尹點惠ㆍ아가다)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최초로 동정을 지키려고 한 사람이었고, 또 최초의 동정녀 공동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윤점혜는 순교자 윤운혜(마르타)의 친언니이며, 조선교회 최초의 밀사였던 윤유일(바오로)의 사촌 여동생으로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이씨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녀는 동정을 지키려는 뜻을 나타내면서 이를 만류하는 가족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에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감으로 남자 옷을 만들어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날 남장을 하고는 윤유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어머니는 딸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줄로 생각하고 밤낮으로 통곡하였는데, 두어 달 후 딸이 돌아오자 그의 뜻을 지켜주기로 하였다.
1795년 윤유일이 순교한 뒤 윤점혜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였다. 여기에서 그녀는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당시 강완숙의 집은 주문모(야고보)신부의 은신처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아가다는 1797년에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윤점혜가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강완숙의 집에 동정녀 공동체가 형성되면서였다. 이렇게 동정녀들이 함께 모여 수녀원과 같은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윤점혜를 그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그녀는 동정녀들을 지도하며,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고, 극기와 성서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례명인 아가다 성녀를 공경하기를 아주 열심히 하여 성녀처럼 순교를 원하였고, 곁에 있는 교우들에게 이 성녀를 주보로 삼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아가다 성녀를 본받으려는 순교신심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강완숙의 집은 밀고 되었고, 2월 말경에는 윤점혜도 강완숙 등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그들은 3개월간을 갇혀 있으면서 온갖 모욕과 배교의 위협과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사령들은 한결같이『10년 동안이나 진심으로 믿어 온 신앙이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로 맹세한 만큼 어떤 형벌을 받아 죽는다 하더라고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5월 22일 (양력 7월 2일) 마침내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윤점혜는 동료들과 같은 장소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없었다.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의미에서 그녀를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처형되기 전날 밤 윤점혜가 갇힌 감옥에는 여교우 한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그 여교우는 훗날『아가다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았고, 일상과 같이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증언하였다.
이렇게 하여 윤점혜는 1801년 5월 24일에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순교를 지켜본 교우들은 한결같이『순교자의 시신에서 흐르는 피가 젖과 같이 희게 보였다』라고 증언하였으니, 바로 이 말은 조선 사람들이 기적의 형상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애석한 것은 포졸들의 감시로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안장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천의 어농리 성지에서는 아가다의 의묘(擬墓)만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의묘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진정한 순례는 반드시 순교자의 전구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신앙 후손들이 이곳을 찾아 자발적으로 현양한다면, 언젠가는 그분의 시복을 맞이하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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