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일기자로 초빙된 초대 편집국장 윤광선씨
“그리스도 향내 지면 가득하길”
취재 편집 수금 보급 등 1인4역
원시적 환경… 사명감으로 극복
창간 발기인 부친 격려 “큰 힘”
『벌써 50년이 지난 일이야. 그때 일은 늘 가슴에서 떠나지 않지만 언제 또 다시 신문 만들 기회가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불러주니 고맙네. 엄청나게 발전했어. 요즘은 첨단 컴퓨터로 자체 제작도 하고, 독자관리에다 발송까지 거의 모든 일이 컴퓨터로 이루어지니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지』
4월18일, 가톨릭신문 일일기자로 제작에 참여한 초대 편집국장 윤광선(비오ㆍ82ㆍ영남 교회사 연구소 명예소장)씨의 얼굴엔 마치 새 봄을 맞는 여인처럼 설레임과 흥분이 찾아든다.
전산제작실에서 후배 기자와 나란히 앉은 그는 갖가지 장비들이 낯선듯 말문을 연다. 윤씨는 1949년 3월부터 60년 9월까지 초대 편집국장으로 신문제작을 담당했다. 고(故)한솔 이효상(아킬로ㆍ전 국회의장)씨 등 창간 위원들의 뒤를 이어 활동하던 시기다.
가톨릭신문의 전신인「천주교회보」가 한국 천주교회 사정으로 33년 폐간됐다가 49년 복간됨으로써 윤 국장은 49년 3월 1일자 복간호부터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그의 재임기간중에 당시 「가톨릭시보」가 주간으로 완전히 정착되기도 했다.
『우리 일할 땐 아무것도 없었어. 의욕과 용기만 갖고 일했지. 6ㆍ25전란 때는 사무실도 책상 하나도 없이 원고뭉치를 들고 약 4년 동안 이집 저집 돌아다녀야 했던 잊지못할 시절도 있었지』
조판이 끝난 1차 대장(臺帳)을 손에 들고 감회에 젖은 듯 바라보는 윤씨. 그의 추억은 계속된다.
『타블로이드판으로 2면 혹은 4면씩 발행하고 했는데 전쟁으로 서울의 가톨릭 출판이 모두 정지돼 「경향잡지」가 복간될 때까지 4년간 가톨릭시보가 국내 유일한 가톨릭 정기 간행물이었어요. 반공이념투쟁이나 가톨릭 정신과 문화를 알려주는 사명을 홀로 떠맡았지. 그때 발행부수가 6천5백부쯤 됐는데 당시 일간지들도 2만부가 많다고 하던 때라 가톨릭시보는 종교신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내용과 많은 독자를 가진 간행물로 환영받았어. 특히 군종신부들은 가톨릭시보를 기다리면서 「가톨릭시보에서 강론재료를 얻는다」고 했었지』
55년 당시 대구 매일신문이 자유당의 사주로 피습당했을때 가톨릭시보가 발행을 대신했던 일, 주간지로 인가받기 위해 10년 가까운 세월을 애태웠던 일, 취재 교정 편집 등 제작에서부터 수금 보급까지 1인 4역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 그가 풀어놓을 이야기는 끝이 없어 보인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시보사 사장으로 계실 때 전국적으로 더욱 알려지면서 권위를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2차 바티칸 공의회 내용을 상세히 또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인기를 끌었지요』
윤씨는 신문사 재직 당시 「천주교회보」의 창간 발기인으로 참가했던 아버지의 격려와 이해가 큰 힘이 됐다고 덧붙인다.
1ㆍ2차 교정과 사진 스케너 작업을 끝내고 인쇄에 들어갈 출력지를 기다리는 동안 다소 가라앉은 듯 한 윤 국장의 목소리가 눈길을 끈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땐 원시적이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함께 일했던 당시 동료들은 마치「의용군」과도 같았어요. 동지애 같은 것이 있었지. 사명감 하나로 똘똘 뭉쳤으니까. 교회 장상들도 우리 속을 다 몰라요. 천주교회보를 만들었던 우리 선배들은 더했지요. 정말 용기있는 분들이고 선각자들이셨어요』
후배 기자가 물었다.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가톨릭신문을 지탱해준 정신은 무엇입니까』
『세상도 변했고 사람들도 많이 변했어요. 하지만 비오 10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말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신문을 만드는 일에 내가 몸 바칠 수 있다면 교황직도 기꺼이 버리겠다고 하신 그런 정신이겠지.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가톨릭신문은 마땅히 지녀야할 무게가 있고, 그 정도(正導)를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거야. 물론 쉽지않은 일이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들을 담아야 하겠습니까』. 다른 기자가 물었다.
『신문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스며 나와야지요. 같은 기사라도 가톨릭신문 기자가 쓴 것은 틀립니다.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야 해요. 우리는 독자들을 참된 신앙인으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46년 전 편집국장과 후배들의 만남. 이들의 조우(遭遇)는 참으로 많은 의미를, 그리고 숙제를 던져주었다. 그것은 바로 고희를 눈앞에 둔 연륜에 걸맞게 충실한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라는 것.
깊이 패인 주림, 꾸부정한 허리. 후배들을 뒤로 하고 총총걸음으로 편집국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가톨릭신문의 질긴 생명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있게 한 알 수 없는 그분의 힘에 감사를 드렸다.
◆ 되돌아 본 가톨릭신문 지령 2천호
평신도 주축으로 창간된 교회 매스컴 사도직의 맏형
사시 - 소식보도, 의견교환, 보조일치
1927년 4월1일에 창간돼 한국교회 발전과 궤적을 같이해온 가톨릭신문이 4월28일자로 지령 2천호를 맞았다.
가톨릭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현재까지 크게 교회소식과 진리전파, 복음을 통한 인간순화를 목표로 줄곧 교회의 사명을 찾고 확인하고 전하는 일에 69년 역사를 바쳐온 셈이다.
특히 가톨릭신문의 전신, 천주교회보는 서울의 장면씨와 유홍렬씨를 비롯 대구의 최정복 이효상씨 등이 한국교회의 청년운동을 주도하고 있을 당시, 남방천주교 청년회원들인 최정복, 윤창두, 이효상, 서정섭, 최재복씨 등에 의해 순수한 평신도 신문으로 출발했다.
소식보도, 의견교환, 보조일치라는 사시(社是)로 교회를 대변해 온 가톨릭신문의 69개 성상은 결코 순탄치 만은 않았다.
교회에 재정적으로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던 시절, 청년들의 순수한 열성 하나로 발행된 신문이 어떤 때는 재원이 떨어져 몇일씩 신문발행을 늦춰야 하기도 했다.
처음 천주교회보가 창간될 당시 4ㆍ6배판 월간으로 발행했으나 창간 1년 만에 타블로이드판으로 판형을 바꾸고 간도지방 지국 설치, 31년 천주교회보사 발족 등 변화를 거듭했던 천주교회보는 1933년 교회 내적인 문제로 주교 교서에 의해 폐간됨에 따라 이후 16년의 휴지기에 들어간다.
물론 천주교회보 창간당시에는 국한문 혼용체로 시작했지만 타블로이드판으로 바뀌면서 한글 보급에 앞장서자는 취지로 순수 한글전용으로 전환, 독자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 독자라고는 고작 4~5천명에 불과했지만 한국교회 전체 신자수가 1928년도에 3만5천여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독자였다.
이미 이때도 지국이 설치됐던 간도지방은 물론 멀리 하와이까지 독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당시 조선 동아 등 몇 년 앞서 발행한 일간신문들도 2만부 정도를 웃도는 부수였는데 비해 과히 그 당시 가톨릭신문이 한국교회에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 후 가톨릭신문은 1949년 4월1일 16년간의 휴간후 제74호로 속간되면서 그해 6월 처음으로 사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6ㆍ25동란으로 다시 5개월간 휴간하고 이듬해부터 교구에서 신문사를 인수, 교구에서 발행하는 신문체제로 그 위상이 변하게 됐다.
천주교회보가 가톨릭신보, 가톨릭시보, 가톨릭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면서 지령 2천호를 맞는 동안 가톨릭신문은 16명의 사장신부와 6명의 주간신부가 재임했다. 역대 신문사 사장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64년 6월1일부터 66년 4월30일까지 사장신부를 맡아 가톨릭신문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신문사 사장으로 재직당시 마산교구장으로 피임되기도 했다.
59년 10월11일자부터 현재의 신문판형으로 자리를 잡은 가톨릭신문은 이듬해인 60년부터 월 2회 발행에서 매주 1회 발행으로 정착되는 발전을 거듭, 일요한담 등 인기 연재물을 싣기 시작했으며 68년 국내 성지순례와 82년 해외 성지순례를 주선, 최초로 국내외 성지순례를 이끌기도 했다.
아울러 미국 교포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84년부터는 미국지사를 개설하고 미주판을 신설, 해외 교포신자들에게 고국교회의 소식 전달과 함께 신앙생활의 길잡이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88년에는 창간 60주년 기념 신자의식 설문조사를 실시,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신자들의 의식과 신앙생활을 조사 분석하고 그 지표를 제시하는 자료집을 출간한 바 있다.
평신도에 의해 스스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맥을 이어 평신도의 힘으로 창간돼 지령 2천호를 맞은 가톨릭신문. 한때는 신문과 잡지 등 모든 것을 통틀어 한국교회 유일무이의 출판물이었던 가톨릭신문은 전국 각 교구에 골고루 산재해 있는 독자들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현재 11곳에 지사를 두고 명실상부한 언론 사도직의 맏형 노릇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역사 자체가 곧 한국교회의 역사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해 온 가톨릭신문은 이제 97년 4월1일로 창간 70주년을 바라보며 제2의 창간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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