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사의 수 문제
우리가 알고 있는 성사는 일곱 가지이다. 세례, 견진, 성체, 화해(고백), 혼인, 도유(병자) 그리고 신품성사가 그것이다. 이 수는 1547년 트렌트 공의회 제7회기에서 규정되었다. 공의회는 종류를 나열하기 앞서 『더도 덜도 아닌 일곱 뿐』(덴징어 1601)이라고 못박았던 것이다. 공의회의 이 규정은 그 후 가톨릭의 교리서들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가르쳐졌고 지금도 성사의 수는 일곱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성사는 과연
일곱 가지 뿐인가?
성사의 수를 일곱 가지로 정리해서 말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후 거의 1천여 년이나 지나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신학에 입각해서 은총의 상징으로 보이는 언행들과 사물들을 총체적으로 성사의 차원에서 알아들었다. 이 시대부터 성사의 수를 많게는 30가지로, 적게는 20가지로 말하는 학자들이 여기 저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150년 경 베드로 아벨라르도라는 사람이 그 수를 6가지로 한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사의 수를 일곱으로 고정시킨 사람은 정작 다른 사람이다.
불란서 빠리의 신학자 베드로 롬바르도(주후 1160년 경 사망)가 성서와 교부문헌들을 자료로 당대의 제반 신학상 문제들을 정리한 후 그에 덧붙여 자신의 견해와 결론들을 전개했는데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일곱 가지 성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책은 뒤이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교과서처럼 받아들여졌고 아울러 사목자들에게도 유용한 책으로 접수되어 신자들에게 여과과정 없이 그대로 전수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적 업적은 1215년 제4차 라떼란 공의회에서 『우리는 베드로 롬바르도와 더불어…믿고 고백한다』(덴징어 804)라는 말을 통해서 공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롬바르도 이래 가톨릭 안에서는 교리적으로 성사가 일곱 가지인 것으로 알아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트렌트 공의회에서 규정한 것은 사실 라떼란 공의회에서 인정했던 롬바르도의 규정을 재확인한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에서 천명한 성사의 일곱 가지는 그 후 교리서에 수록되어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르쳐졌고 같은 교리서를 가지고 선교지역으로 향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급기야 전 세계의 예비 그리스도교인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 조정은 교회 소관
하지만 분명히 알고 지나가야 할 사실들이 있다. 첫째,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성사는 일곱 가지임에 틀림이 없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도 과거의 교리적 가르침들을 받아들여 같은 사실을 강조한다(1113항). 그러나 라너의 신학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 성사들이 성사들이기 위해서는 그 성사들을 성사이게 한 본래의 성사가 있다는 것과 그 본래의 성사 역시 성사이게 한 원성사가 있다는 사실이 숙지되는 가운데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달리 말하면 일곱 가지 성사는 원성사로 인해서 그리고 본래의 성사로부터 나옴으로써 성사일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성사의 수는 비록 일곱으로 한정되어 있으나 일곱이라는 한정된 성사로서가 아니라 원성사처럼, 본성사처럼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인격적 존재인 교회처럼 전체적인 삶이라는 폭넓은 성사의 테두리 안에서 정점으로서의 순간들을, 그러면서도 인격적으로 발전하는 과정들을 『자아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강조하고 특징짓기 위해 일곱 가지로 정해 놓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 첫째의 사실이 이미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성사의 수는 전적으로 교회의 행위와 삶에 연관되는 것이기에 성사의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의식의 발전이나 성사거행의 방식을 포함해서 그 수의 조정문제까지도 원칙적으로 교회 소관의 사항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교회야말로 존재론적으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항구한 현존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사의 수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론적이면서도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한다면 문제시할 것이 없다. 한마디로 가톨릭이든 비가톨릭이든 일곱이라는 숫자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곱가지 뿐인가?
사실 베드로 롬바르도 이전에 1천여 년 동안, 특히 성 아우구스띠누스 이후 만을 생각해도 7~8백 년 동안 일곱이라는 숫자와는 관계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연관되어 있는 거룩한 행위들과 의식들, 예로써 신앙고백이나 주의 기도를 포함해서 십자성호를 긋는 일, 아멘이나 알렐루야를 외치는 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일생과 연결시켜 지내는 축제 등을 성사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표현하며 살아왔던 역사는 물론이고 베드로 아벨라르도와 베드로 롬바르도 이후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도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러 가던 중 『성사는 꼭 일곱이어야 하는가?』하고 궁금해 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옹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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