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주님을 위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한국 최초의 부부 순교자인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와 윤운혜(尹雲惠, 마르타)가 순교시에 남긴 말이다. 이들 부부는 비록 한 날 한 시에 순교하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유언은 이처럼 맞춘 듯이 똑같았다. 경기도 여주 부곡면에서 태어난 정광수는 성장한 뒤, 고향에서 아주 가까운 양근의 학자 신자였던 권철신(암브로시오) 형제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면서 차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1791년에는 마침내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정광수는 전통의 학문보다는 신앙생활에 더 열심이었다. 이에 신자들이 그에게 한 젊은 여성을 중매하게 되었으니, 그가 곧 윤운혜였다.
윤운혜는 양근의 유명한 신자 집안인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실천해 오고 있었다. 특히 그의 언니인 윤점혜(아가다)는 일찍부터 동정을 허원할 정도로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정광수와 윤운혜의 혼인 말이 오가게 되자 외교인이던 정광수의 어머니가 이를 심하게 반대하고 나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위의 도움으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결혼한 뒤부터 그들 부부가 극복해야 할 문제는 제사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 부부는 핑계를 대고 서울로 피신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윤운혜는『제사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다. 이렇다 보니 그들 부부는 자연 집안 식구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외교인들 틈에서는 더 이상 계명을 지키며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1799년에 함께 서울 벽동으로 이사하였다.
서울에서의 삶은 그들에게 희망이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정광수는 이미 1797년에 주문모(야고보)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그의 편지를 받아다가 김건순(요사팟)에게 전한 적이 있었으므로 주 신부와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들 부부는 집 마당 한 편에 따로 공소 강당을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곳을 신자 공동체의 모임 장소로도 제공하였다. 실제로 벽동의 집은 교우들이 십시일반으로 희사하여 마련한 집이었으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공소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는 성물이 매우 부족하였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상본도 없었고, 묵주도 없었으며 교리서도 매우 부족하였다. 정광수와 윤운혜 부부는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밤이면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고, 나무를 깎아서 묵주를 만들고, 여러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낮이면 몰래 교우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나누어 주었다. 이와 같은 교리서 및 성물 · 성화의 보급은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윤운혜는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부부도 멀지 않아 체포될 것이라 예감하고 남편을 잠시 피신시켰다.
그리고 혼자 집에 남아있다가 1801년 2월 포졸들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었다. 그녀는 즉시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지만, 모든 형벌을 신앙으로 극복하고는 4월 2일에 참수형을 받고 칼날 아래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에서는 정광수를 함께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고향인 여주 부곡면으로 포졸을 보내 체포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정광수는 이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생활하다가 법망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그는 포도청에서 몇 차례 무서운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한 뒤 이미 순교한 아내를 좇아 신앙을 고백하고 12월 26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 부부는 영원히 보배로운 피로 다시 합쳐지게 되었다. 그러니 신앙 후손인 우리들로서는 마땅히 그들의 순교 신심을 이어받고, 그 아름다운 죽음을 현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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