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6일은 김대건 신부 시성 12주년을 맞는 날이다. 특히 금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백50주년의 해로 김 신부를 비롯한 1백3위 한국 순교 성인 시성 기념일을 맞는 5월은 여느 해보다 사뭇 남다르다.
지난 사순절 전국 도보 성지순례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신앙혼이 살아 숨쉬는 국내 성지를 순례, 전 교회적인 호응을 받은 가톨릭신문은 5월 한 달간 김대건 신부 시성 12주년을 기념해 중국과 마카오, 마닐라 김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해외 현지 취재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현장르포를 기획했다.
김대건 신부와 관련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보여줄 이번 기획 취재를 위해 협조를 아끼지 않은 중국과 홍콩, 마카오, 필리핀 한인 신자 공동체에 감사한다.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을 표시하는 천연적 경계인 두만강.
4월 중순인데도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고 아직 얼음이 얼어 있는 곳도 있다. 더욱이 방향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돌풍과 회오리바람이 사방에서 불어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또 이 곳 사람들의 난방재료가 거의 나무나 석탄뿐이어서 온 도시가 연탄가스 냄새로 자욱해 제대로 숨 쉴 수 조차 없다.
도시와 들판이 모두 먼지와 연탄가스로 가득 덮인 두만 강변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일치를 염원하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매년 몰려들고 있다. 이곳에 오면 비록 건너갈 수는 없지만 눈으로 만이라도 그리운 고향, 조국 산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훨씬 이른 지금으로부터 약 1백 50여 년 경 정확히 말해 1백 52년 전 지금의 우리가 북한 산하를 보기 위해 찾아가는 같은 장소에 신학생이던 약과 23세의 청년 김대건이 서 있었다.
한 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는 두만강변의 중국 훈춘에 신학생 김대건이 발을 디딘 것은 1844년 2월말경.
김대건이 훈춘에 온 것은 해마다 훈춘과 40여 리 떨어진 조선의 제일 가까운 도시인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겨울에 국경을 열고 국제 교역을 위한 5일장이 들어서는데 이곳에서 신자들과 비밀리에 접촉,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북서쪽은 온성군과 회령시, 남쪽은 은덕군이 닿아있고 동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마주하고 있는 함경북도 경원군은 1977년 김일성 부자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김정일을 상징하는 샛별을 따서 지금은 「새별군」으로 고쳐져 불리고 있다.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접촉할만한 지점은 남쪽 압록 강변에 있는 봉황성 변문 외에는 오직 이곳 두만강변의 훈춘 뿐이었다.
김대건은 두만 강변을 통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장춘(長春)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2천리나 되는 훈춘까지 온 것이다.
조선 신자들도 신학생 김대건을 맞기 위해 경원에서 한 달 이상 머물고 있었다.
훈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경제 특구로 지정, 중국 주석 장쩌민(姜澤民)이 두 번이나 다녀갈 정도로 국제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는 도시이다.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는 이 곳이지만 훈춘은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신학생이던 김대건이 훈춘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땅 경원으로 들어간 옛 길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훈춘에서만 72년간을 살았다는 훈춘공소 박용진(이시돌·84)회장은 경향잡지를 통해 『김대건 신부가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훈춘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고 많은 자료를 입수, 김대건 신부의 옛길을 찾아보았다』며 『경원까지나 있는 길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어 김 신부가 걸었던 길을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훈춘공소 박용진 회장의 아들 박경철(아타나시오)씨의 안내로 국경을 잇는 사타자 다리 밑으로 해서 북한군 초소가 있는 1백50여 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최근 북한 특무조들이 연길과 도문, 훈춘 등지에 나타나 한국인 관광객들을 노리고 있어 개인행동은 삼가해야 한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신학생이 건넜던 길을 사진에 담아야겠기에 무리를 했다.
「촬영금지」라는 붉은 글씨의 커다란 경고문을 뒤로하고 중국 국경수비대원들이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음을 모르는 채 하며 바닥을 드러낸 두만강을 따라 북한군 초소 최접경까지 갔다.
튼튼한 콘크리트 벙커로 만들어진 북한군 초소가 드러나자 더 이상 갈수 없다는 암담함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오직 이 길만이 조선을 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혹한을 무릅쓰고 경원까지 왔건만 신학생 김대건이 전해 들은 것은 『이 길을 통해선 선교사들을 모실 수 없다』는 얘기였다. 이 길을 통해서는 서울까지 함경도 땅 전체를 가로 질러야하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에 신자들이 반대한 것이다.
아마도 기자가 북한군 초소를 보고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암담함을 느낀 그 심정보다 김대건 신학생은 조선 신자들의 말을 듣고 몇 천배 몇 만 배 더 무거운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조선 신자들과 헤어져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간 김대건은 1844년 12월15일 부제품을 받고 다음해 1845년 1월1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김대건 신부는 이때 『압록강을 건넌 후 의주에서 만나기로 한 신자들과 접촉하지 못해 눈 쌓인 들판 거름더미에서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날밤을 지새웠다』고 편지에 남기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신자들과 만난 김대건 부제는 1836년 12월15일 신부가 되기 위해 서울을 떠났지만 9년만인 1845년 1월15일 서울에 당도하자마자 보름 넘게 중병을 앓았다. 24살의 나이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짐과 긴장을 한꺼번에 풀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약 5개월을 보낸 김대건 부제는 다시 서양 선교사들을 모셔오기 위해 상해로 떠났고 그해 8월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서품후 같은 해 10월 12일 충청도 황산포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와 황해도 해주에서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다 체포, 1846년 9월16일 만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고 만다.
김대건 신부의 생애중 가장 귀중한 시기의 하나인 1842년 3월10일 마닐라에서 출발, 1846년 9월16일 순교 때까지 4년6개월간 김 신부는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정열을 쏟았다.
그 길이 자신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대건 신부는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김대건 신부는 우리 민족에 복음의 씨앗을 퍼트리기 위해 중국에서 마카오로 다시 마닐라에서 중국으로 넘나들었으며 상해에서 남경, 심양, 장춘, 훈춘까지 중국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걸어서 가로질러 왔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향한 이 발걸음은 중국 대륙에도 수많은 자취를 남겨놓았다.
연길 도문공소 신자들은 공소벽 한 켠에 예수와 성모 성상 사진과 함께 김대건 신부의 상본을 걸어놓고 김 신부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또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조선 입국로 개척의 거점이 되었던 소팔가자에서도 많은 중국인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를 공경하고 있다.
이 곳 신자들 사이에는 일제 강점기 초까지 김대건 신부가 부제때 썼던 모자가 소팔가자 성당에 모셔져 왔는데 두통을 앓거나 심한 병이 생겼을 때 김 신부의 유품을 만지기만 하면 깨끗이 나았다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소팔가자 신자들은 지금도 『아마 김대건 신부의 유품을 신자중 누군가가 몰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김대건 신부를 「기적을 낳는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옥중에서도 조선 입국을 준비하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내『산동 어선들은 음력 3월에 백령도에 나오며, 음력 5월에 돌아간다』고 알리면서 『비록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가지 못할 지라도 신부님들이 조선에 오시도록 주선해 달라 』고 당부를 아끼지 않은 영원한 탁덕 김대건 신부.
그의 생은 오직 순교를 향해 곧바로 뻗어있는 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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