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사의 필요성 문제
우리는 성사가 『그리스도께서 은총을 주기 위해 제정하신 외적 표상』이라고 교리교육을 받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하느님께서 성사나 교회를 통하지 않고도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라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성사나 교회가 꼭 있을 필요가 있는가?
가톨릭 교리사를 보면 성사나 교회 밖에서도 은총이 주어진다는 의식 즉 은총은 성사적이고 교회적인 중재를 통해서 베풀어진다는 정도보다도 훨씬 더 폭넓게 베풀어진다는 인식이 발전적으로 깊어져 왔고 또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성사신학의 대가에게서 이미 그러한 인식의 깊어진 면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성 아우구스띠누스가 요점을 정리해 놓은 성사에 관한 식견 곧 『구원 하시고자 하는 신적 힘은 성사들에게 속박되지 않는다』(S.Th.Ⅲ 72, 6 ad 1)는 그 식견을 분명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변호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한 것이다.
하느님의 자유의지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구원행위가 그분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생겨난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스스로 자유이시고 그분은 당신의 자유로써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하시기에 그분과 그분의 일을 나타내는 표현인 은총 역시 그분의 자유에 해당하기 마련이라는 것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식은 신약성서의 내용들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바로 그러한 인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구원(혹은 은총)이 단순히 교회의 예절들을 통해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뛰어 넘은 그야말로 보편적인 구원의 신비에 대한 이해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도 명백하게 지적되었다.
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사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기의 탓 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 못할 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 사실, 그들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결국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 (교회헌장 16항)
그러므로 전통적인 인식은 교회의 일곱 가지 은총의 표상들인 성사들이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 존재 자체와 사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대단히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L.Ott같은 이는 necessitasconvenientiae(혹은congruentiae) 즉 적합의 필요성 혹은 화합의 필요성이라고 표현했다.
구원위해 아주 적당
성사들은 교회가 지닌 사회적 본성과 그 본성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면을 고려해 볼 때 적당한 것들이다. 실제로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느낌을 갖게해 주는 상징들 없이 그러한 신앙 공동체가 존재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확신을 갖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사들은 또한 신앙과 신뢰 그리고 이웃사랑을 위한 기본적인 태도를 다지고 진전시키는데 효과가 있다. 성사들은 구원에 대한 신적인 약속으로서의 서약이라는 방식으로 신앙과 신뢰를 일깨워주고 그 성사들이 공적으로 거행되는 구체적인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끼리 연대와 결속의식을 강화시키는 가운데 교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사랑을 키워나가기(S.Th.Ⅲ 61.1)때문이다. 그래서 성사들은 전통적인 이해의 차원에서도 적합한 것들이다.
사실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세례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말하면서도(1257항)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인간의 궁극적인 사명도 결국 하나뿐이며, 그것은 신적인 것이므로 성령께서는 하느님만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사목헌장 22항: 교회헌장 16항: 선교교령 7항)의 내용을 참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른다고 해도, 진리를 찾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세례의 필요성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세례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1260항)라고 그리스도론적이고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말할 때의 의도도 이러한 맥락에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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