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가 처음으로 혼자 걸을 수 있었던 어린 날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 놀랍고 신비로운 현상을 지켜보고 있었을 사람은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였을 것이고, 그들은 분명히 탄성을 지르며 감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걷기 시작한 어린 아이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걸음을 배우는 아이는 말 못하는 기쁨에 하루종일 지치지도 않고 걷는다. 아이에게 집은 더 이상 전우주가 아니기에, 아이는 세상을 알고 싶어 자꾸만 문으로 향한다. 평평한 방바닥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모래, 빗물이 고인 땅, 자갈길, 눈길, 계단 등의 감각을 조그마한 발로 느끼고 체험하고 싶은 욕구가 넘치고 넘치리라. 놀라운 에너지로 걷고, 넘어지고 또 걷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걸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삶에 획기적인 사건이 아닌가! 한 발, 두 발, 걷기 시작한 아이는 스스로 세상을 체험할 수 있다. 걷는 것은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상징이며, 주변환경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과 같다. 걸어 다니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행위를 넘어서 정신과 의지와 영혼의 표현이다.
걷고 싶은 봄날이다. 아이가 걷는 것에 취해 있듯이, 이 봄에 온갖 나무들도 꽃피우는 것에 취해있다. 푸르런 봄날에 걸음마를 연습하는 아이를 바라보면, 꽃피는 것을 바라보듯 아름답고 신기하다.
그러나 길이나 공원에서는 걷기에 황홀하게 취해있는 어린이들 보다, 걷는 것으로 부모와 신경전을 벌이는 아이들을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어린아이는 혼자서 걷고 싶어하고 어른들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려 한다. 어린아이의 보폭을 기다려 줄 수 없는 어른들은 쉽게 아이를 안아 버리거나 유모차에 태우고, 아이는 완강한 거부를 하면서 울어 버린다. 온 몸으로 울며 걷고 싶어하는 모습은 자유와 자주적인 능력을 빼앗긴 아이의 좌절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감격은 너무 짧은 것 같다. 그들은 어린이들을 너무 빨리 또 쉽게 어른의 세계로 데리고 와서 짜증나고 권태로운 일상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리고 어찌하여 걷는 것에 무감각해져서 살아가게 되었을까? 대지가 부드러운 이 봄날에 천천히 걷는 것을 다시 배우고 싶다. 그러면 우리가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의 그 기쁨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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