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박해
1793년 12월22일, 한 조선의 젊은이가 북경의 남당 천주당으로 구베아(Gouvea) 주교를 방문하였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교우들이 밀사로 선발하여 보낸 지황(池璜, 사바)이었다. 이때 그와 함께 북경으로 간 사람은 백 요한이란 교우였고, 첫 번째 밀사였던 윤유일(바오로)은 국경 부근에 남아 선교사를 안전하게 모셔들일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또 같은 시기에 그들의 동료인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은 한양에서 선교사가 거처할 집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최인길은 중인 계층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또 지황은 궁중 악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운 사람이었다. 그는 본성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여 교리를 잘 연구한 뒤로는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열중하였고, 그분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였다.
이에 앞서 구베아 주교는1791년에 젊은 사제 레메디오스(Remedios) 신부를 선택하여 조선으로 파견하였었다. 그러나 악속한 시기가 엇갈린 탓에 레메디오스 신부는 조선 교우들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되돌아가야만 하였다. 이와 같은 처음의 실패가 있었으므로 구베아 주교는 지황에게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면서 성직자 파견 날짜, 만날 장소, 서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식 등을 단단히 정해 주었다. 그리고 북경에서 사제로 서품된 주문모(야고보)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간택하였다.
그 후 주문모 신부는 지황과 함께 1794년 12월3일(양력 1795년 1월3일) 밤에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유일과 최인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주로 한적한 산길로 걸었고, 노숙하다시피 하면서 12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여 바로 계동에 마련되어 있던 최인길의 집으로 갔다. 이때부터 주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795년 4월5일(양력)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여 조선에서 최초로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밀고자는 교회의 위험을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이벽(요한)의 형 이격이 밀고자의 곁에 있다가 그 내용을 듣고는 재빨리 빠져나와 주 신부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물론 주 신부와 교우들의 놀라움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당황하고 있을 때 최인길이 아주 훌륭한 꾀를 냈다. 그는 이미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제가 중국어를 잘 아니, 중국인과 같이 머리를 자른 뒤 신부님 모습을 하고 행동한다면 포졸들도 감쪽같이 속을 것입니다』라고 제안하였다. 곧 이어 포졸들이 쳐들어왔을 때, 주 신부는 이미 교우들의 안내를 받아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한 뒤였다.
최인길은 계획대로 용감하게 주문모 신부 행세를 하면서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러나 포도청으로 끌려간 지 오래지 않아 본래의 신분이 들통 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배교자의 밀고로 성직자 영입에 앞장섰던 윤유일과 지황도 그날 밤 안으로 고향과 거처에서 각각 잡혀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을묘박해였다.
순교자의 신앙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굳센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항구한 신앙」또는 「위대한 순교신심」이라 부른다. 포도청의 박해자들 기록에도 순교자들은『죽음을 기뻐하고, 삶을 미워하며,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이 하고, 입을 꼭 다물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조선의 밀사들도 바로 이와 같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의 영웅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포도대장 앞에 불려나간 그들은 무서운 형벌과 악의의 술책과 잔인성을 침묵과 인내와 항구함으로 이겨냈으며, 이로 인해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무수한 매를 맞아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때가 1795년 6월28일로, 최인길의 나이는 31세, 지황의 나이는 29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으며, 이것이 그들에게는 영원한 삶이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2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 신앙 후손들은 비로소 그들의 시복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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