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고 그 기반을 닦는 데 노력한 유명한 집안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양근 땅 마재(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 살던 정씨 집안이다. 이 집안의 4형제 중에서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둘째인 정약전과 넷째인 정약용(요한)이었다. 반면에 셋째인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은 그들보다 늦게 입교하였지만,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순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우인 정약용이 조선 5백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였다면, 정약종은 그 학문의 여력을 오로지 신앙에 쏟아부은 가장 위대한 순교자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760년 마재에서 태어난 정약종은 집안의 학풍을 이어받아 학문에 열중하다 혼인한 뒤 광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첫 부인이 맏아들 정철상(가롤로)만을 남겨둔 채 1781년경에 병사하여 새로 유 세시리아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는 아직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기였는데, 그는 훗날 두번째 부인에게서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녀 정정혜(엘리사벳)를 얻게 되었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1784년에 두 형제가 입교하면서 자연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86년에 세례를 받은 그는 즉시 교리 연구에 열중하여 이내 가장 해박한 전교자가 되었다. 신자들을 만나 오직 교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어느 신자가 어떤 교리를 물어와도 마치 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모든 내용을 설명해 줄 정도가 되었다.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1791년의 조상 제사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특히 조선의 양반 신자들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고민을 가져다 주었다. 정약종 형제와 신앙의 동료들 또한 이로 인해 교회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니, 바로 그것은「존재」(신과 신앙)와「당위」(전통과 윤리)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약종만은 홀로 존재(신앙)를 굳게 믿었고 오히려 더욱 열정을 발하였다.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병들어 괴롭거나 양식이 없어 굶주림을 당할 때에도 그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으며,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들을 보면 정성을 다해 가르쳐서 혀가 굳고 목이 아플 때까지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심과 교리지식을 바탕으로 정약종은 마침내「주교요지」라는 한글 교리서를 두 권으로 저술하게 되었는데, 훗날 주문모 신부조차도 이를 가장 긴요한 교리서로 채택할 정도였다.
정약종의 활동은 주문모 신부가 명도회를 설립한 뒤 그 초대 회장에 임명하면서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본분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1799년에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신부를 도와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던 중 1801년 초부터 박해가 시작되었고, 게다가 교회 서적과 서한들을 담아두었던 책롱을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안에는 정약종의 서한도 들어 있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그는 2월 11일(음력)고향 마재에 들렀다가 서울로 오던 중에 의금부 도사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히고 말았다. 당시 그는 김건순(요사팟)과 함께 천주교의 모든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성교전서」를 저술하고 있었는데, 박해로 인해 이 일을 완성할 수 없게 되었다.
15일 동안 정약종이 받은 문초와 형벌은 아주 혹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신부에 관한 것이나 신자들에게 해가 될 말은 일체 함구하고, 오히려 천주교 금지령이 부당한 것임을 항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학 죄인에 반역죄가 더해져 참수형 판결을 받고, 2월26일(양력1801년 4월8일)에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형장으로 끌려나갈 때도 그는 길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역설하였으며, 한 번 칼날을 받고는 벌떡 일어나 다시 성호를 그은 다음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무덤 덕택으로 여러 사람이 기적적으로 병이 낳았다고도 한다. 그러니 이 사실을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순교자의 무덤은 본래 자리하고 있던 배알미리(광주군 동부면)에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이 되는 1981년에 천진암으로 이장되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양 운동이 여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시복ㆍ시성 운동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그 후에 한 차원 높은 현양 운동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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