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천주를 알아 사랑한 탓으로
아버지의 위태한 목숨을 뒤에 두고
그의 외로운 어머니마저 홀로 철화 사이에 숨겨두고
처량히 국금과 국경을 벗어 나아간 소년 안드레아!
오문부 이역한 등에서 오로지 천주의 말씀을 배우기에
침식을 잊은
신생 안드레아!
빙설과 주림과 설매에 몸을 부치어 요야 천리를 건너며
악수와 도덕의 밀림을 지나 굳이 막으려 죽이려고 꾀하던
조국 변문을 네 번째 두드린 부제 안드레아!
(정지용 시「승리자 김 안드레아」중에서)
홍콩에서 남동쪽으로 약1천1백㎞ 떨어진 필리핀 루손 섬의 마닐라.
필리핀 수도이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마닐라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국제항구로 유명한 곳이다.
마닐라는 16세기부터 18세기 말 서양 열강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기 이전까지 중국과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이용됐다.
마닐라는 우리의 주인공 소년 김대건과 그의 동기 최양업에게는 그리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픈 곳이 아니었다.
마닐라는 김대건과 그의 동기들에게는「망향의 피난처」였으며, 바빌론 유배시절 산산이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국땅에서 그리운 조국을 꿈꾸며 정을 삭혀야만 했던「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 최방제가 마닐라에 간 것은「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것이었다.
1836년 12월3일 서울을 떠난 지 6개월여 간의 고생 끝에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당도한 김대건 일행은 긴장이 채 풀리기도 전에 파리외방전교 회원들과 함께 마카오를 떠나야만 했다. 포르투갈 식민정치에 불만을 품은 청국인들이 8월에 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대건 일행이 처음 입학한 페낭신학교에서조차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켜 파리외방전교회가 대표부내에「조선인 신학교」를 따로 세워 이들을 가르쳐야 할 만큼 심각했으니 당시 민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김대건 일행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오른 피난길의 기착지가 바로 마닐라였다.
당시 마닐라는 마카오보다 훨씬 규모가 큰 국제 무역도시였고 포르투갈인이 아닌 스페인 선교사 즉 예수회원들이 진출해 있던 곳이다.
김대건 일행의 마닐라 피난길은 두 차례나 이어진다. 마닐라까지 1천여㎞가 넘는 뱃길은 김대건 일행에게는 바로「죽음」을 뜻하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이제 갓 16살이 된 어린 세 소년들에게 이 피난길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항해였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끊일 새 없이 밀려오는 뱃멀미보다 더 큰 고통인「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공포는 신부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부모의 품을 떠날 때와는, 국경을 넘을 때와는, 중국을 종단할 때 가졌던 그 두려움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 세 소년은 마닐라로 가는 이 피난길에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김대건 일행의 마닐라 피난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마닐라에 도착했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세 소년은 잔병으로 고생을 해야만 했고 김대건은 늘 복통과 두통, 위장병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1837년의 마카오 민란은 그래 겨울이 진압돼 마카오로 귀환하게 됐으나 11월 26~27일 밤 사이에 김대건 일행의 맏형이던 최방제가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처럼 두려워하던 죽음이 드디어 들이닥치고 만 것이다.
이 장면을 김대건 신부 첫 전기인「성웅 김대건 전」에서 저자 김구정은『저무는 타향 하늘에 별이 삼형제/반짝 반짝 정답게 비치더니/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 흘린다』라는 시로 그리고 있다.
동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아물기 전인 다음해 1839년 4월6일 마카오 민중이 재봉기하자 김대건과 최양업은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난길에 올랐다.
마닐라로 피난 온 김대건 일행은 다행히 성 도미니꼬 수도회 원장 초청으로 마닐라 인근의 롤롬보이(Lolomboy)에 있는 성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에서 11월 마카오로 귀환할 때까지 약 6개월간 피난살이를 했다.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인 롤롬보이 옛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 자리에는 현재 김대건 신부 사적지가 단장돼 있다.
번잡한 마닐라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필리핀의 전형적인 농촌마을들을 자동차로 약 1시간 가량 지나치다 보면 작은 소도시인 롤롬보이가 나타난다.
롤롬보이에 들어서면 필리핀 대중 교통수단인 지푸니 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방문객을 맞았다.
필리핀 한인 천주교회 신자들이 세워둔「김대건 신부 성지」한글 표지판을 따라 골목길로 가다보면 옛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 자리가 나온다.
롤롬보이 623번지, 지주 멘도사(Mendosa)가문의 사유지이다.
김대건 신부 시성을 기념해 멘도사 여사가 옛 수도원 터 일부를 1986년에 한국 천주교회에 기증해 이곳에 김대건 신부 사적지를 꾸밀 수 있게 됐다.
멘도사 여사는 1994년 10월에 백수를 채 못 채우고 99세의 나이로 작고했고 지금은 그의 장남 멘도사 내외가 한국의 순례객들을 반갑게 맞고 있다.
이곳은 지난 1986년 5월22일 김수환 추기경과 필리핀 마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가 참석해 제막식을 가진 김대건 신부 동상과 김 신부 경당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은 고 오기선(요셉)신부와 마닐라 한인 천주교회 신자들과 한국의 신자들이 뜻을 모아 만든 것으로 마카오 카모에스 공원에 서있는 김대건 신부상과 똑같은 것이다.
이곳 사적지에는 김대건과 최양업의 피난생활을 회상시키는「망향의 망고나무」가 아직도 있다. 몇 해 전 태풍이 불 때 나무가 부러질 것에 대비해 윗 둥치를 잘라버려 그 자태를 찾아볼 수 없지만 고목의 고고한 자태는 아직도 남아 있다.
망향의 망고나무는 이곳에 피난 와 있던 김대건이 그해 여름(1839년 8월) 아버지 김제준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편지를 받아보게 돼 고향을 그리는 김대건의 마음을 생각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 일행 속에 숨어들었던 한 신자가 북경까지 그 편지를 갖고 와 뭍으로 바다로 해서 몇 만 리를 지나 김대건의 손에 닿은 부친의 편지였다.
아버지 김제준이 쓴 편지의 발신일자는 1837년 가을, 롤롬보이에 있는 김대건의 손에 닿기까지 무려 네해가 걸렸다. 편지 내용은 희소식밖에 없었다. 집안도 무사하며 앵베르 범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 모두가 안녕하다는 소식이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 편지에 뜨거운 눈물을 적시며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 읽고 또 읽고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울 정도로 거듭 거듭 읽었다.
그러나 김대건이 편지를 받고 감격해 할 무렵 조선에선 기해박해가 터져 그의 아버지 김제준과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은 옥고를 치르고 9월 장엄히 순교했다.
김대건이 받은 부친의 편지는 이역만리 떨어진 아들에게 희망과 위안, 기쁨을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사적지에서 약 3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성 김대건 신부를 주보로 모시고 있는「성 십자가와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서 롤롬보이 주민들 모두가 매주일 주보인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며 그의 영성을 본받고 있다.
성당 제대 오른편 벽면에 모셔져 있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보면서 자랑스런 순교자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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