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사에는 우리 후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끝내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하느님 대전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은밀하게 활동하였으므로 관변 측 기록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 위대한 행적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1797년 충청도에 가해진 박해로 순교하게 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는 그러한 전승(傳承)에서 특별히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1743년경에 태어난 바오로는 일찍이 고향인 충청도 청양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입교한 뒤,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을 진정으로 실천하면서 전교 활동에 앞장섰다. 본래 이 지역은 일찍부터 내포 지방에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탓에 조정에서의 박해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바오로의 행적은 여러 가지로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재산을 신앙생활에 바치고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전교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고향인 청양 뿐만 아니라 홍주, 은진, 공주 등지까지 미쳤다.
본래 바오로는 배운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글을 알지 못했으나, 열성이 그의 지식을 뛰어넘었으므로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향에서 이름이 너무 잘 알려지게 되자 할 수 없이 칠갑산 골짜기를 넘어 정산 땅으로 숨어들어 한 옹기 공장에 터전을 잡고 생활하게 되었다. 정산에서도 그의 전교 활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그가 사는 마을 전체가 입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무렵 충청도 관찰사 한용화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함으로써 이름을 빛내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도내에 박해령을 내리게 되었으니, 그때가 1797년이었다.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바오로는 이웃 마을에 살던 외교인에 의해 고발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미 순교할 원의가 있었던 그는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감춘 채 포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6월8일, 마침내 정산 관아에서 보낸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결박하고는 십자고상과 몇 권의 서적들을 찾아낸 뒤, 신부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으나 헛일이었다. 1795년 이후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충청도 지방을 순회했기 때문이다. 이때 포졸들은 그의 동료들 몇몇도 함께 체포하였다.
결박된 채로 관장 앞에 끌려간 바오로는 새로 입교한 동료들의 배교를 안타까워하며 온갖 형벌을 참아 받았다. 교리를 설명하는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에 대한 영원한 영광을 보증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순교의 뜻을 강하게 나타내곤 하였다. 관장이 풍헌 자리 하나를 주겠다고 달랬을 때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결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해가 바뀌면서 겪은 옥중의 겨울은 매우 혹독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매질로 인해 더워진 몸으로 추위를 극복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으로 굶주림을 채워나갔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 자신을 십자가 위에 놓아두었으며, 이것이 그에게는 특별한 은혜였다.
그러는 동안 체포된 지 약 1년이 지나면서 바오로는 장돌림도 여러 차례 당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자,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명령하면서 죽을 때까지 고통을 주도록 하였다. 형장까지 가는 동안에도 형리들은 모진 고문을 가했다. 머리칼을 형틀에 잡아매고 두 팔을 큰 돌에 묶어 놓은 채, 질식할 정도로 칼을 죄거나 삼모장으로 도끼를 치듯 하니 그럴 때마다 상처가 났다.
죽음의 형벌을 받는 동안 입술이 새카맣게 탔고, 겨우 목숨만이 붙어 있었는데도 바오로는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하례하나이다』라고 말한 뒤 실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장은 그가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매질을 계속하도록 하였으니, 무릎이 깨져 뼈가 드러나고 골수가 땅에 흘렀다. 이미 그의 몸은 사람의 형상을 갖추지 있지 않았다.
1798년 6월12일, 마지막으로 형리 하나가 그의 가슴 위에 칼머리를 대고 그 위에 올라가자 갈비뼈가 부러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그로부터 약 1주일이 지난 뒤 교우들은 관장의 명에 의해 묻혀진 시신을 찾아다 안장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순교자가 끝까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를 불렀으니, 어찌 그를 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그러니 시복운동을 통해 다시 한번 순교자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