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잃은 교회 걱정하며 “번민,,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도정(道程)을 거듭할수록 그분의 위대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번 순례 기간 중 기자는 그분의 위대성을 「한국인 최초의 탁덕」이라는 찬연한 광채에 가려져 지금까지 숨겨진 긴 그림자로 남아있던 님의 수많은 삶의 면면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소팔가자」(小八家子)를 취재하면서 「죽음을 이긴 승리자」로 기자 앞에 다가온 김대건 부제의 모습에서 진정한 그의 위대함에 눈뜰 수 있었다.
소팔가자.
중국인들보다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 사이에 더 잘 알려져 있는 중국 길림성(吉林省)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70여 리 거리에 있는 소팔가자는 최근 몇 해 전 향(鄕)으로 승격될 만큼 작은 부락이지만 지금도 마을 주민의 95%가 천주교 신자일 정도로 뿌리깊은 교우촌이다.
소팔가자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이곳을 조선 입국을 위한 입국로 개척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1841년부터 1846년까지 5년간 조선교구의 임시 교구 본부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합류하게 됐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소팔가자가 단순히 신학생이던 김대건이 동기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은 낭만적인 곳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들에게 있어 소팔가자 역시 평안한 안식처만은 아니었다.
소팔가자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대략 1796년경이라 한다. 초대 만주대목구장 베롤(Verolles)주교가 1841년에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 성당을 건립하자 소팔가자는 자연스럽게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교두보가 되었다.
소팔가자에 당도한 것은 김대건 보다 최양업이 먼저였다. 최양업은 1842년 11월 페레올 주교가 머물고 있는 소팔가자에 와 그에게 신학을 배웠다.
김대건은 의주 변문을 중심으로 압록강 일대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다 최양업보다 5개월 늦은 1843년 4월에 소팔가자에 합류했다.
소팔가자에 도착하자마자 김대건은 조국 소식을 궁금해하는 최양업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전했다.
바로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그리고 자신의 부친 김제준은 순교했고 어머니 고 우술라는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말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롤롬보이에서 아버지 김제준의 편지를 최양업과 돌려보며 고향 이야기를 주고 받던 것이 엊그제 일같이 생생한데 이젠 부모의 죽음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건은 아버지의 순교보다 목자를 잃은 조국에 더 큰 슬픔을 느낀다.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다 다 삼켜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라고 쓴 그의 편지에서 김대건은 이미 인간의 정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크게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 내용을 보면 이미 김대건에게 있어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발점에 불과하지 그 이상 다른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이긴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이 처음으로 발견되는 대목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사를 지은 달레도 그의 저서에서 기자와 같은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 달레는 『소팔가자에 오기 전까지 병약했던 김대건의 기질이 나아졌다. 육지와 바다에서 겪은 그의 여행은 그의 육체적인 힘을 발달시켜 줌과 동시에 그의 기력과 타고난 마음의 대담성을 왕성하게 하고 원숙하게 하여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팔가자에서 만주 신학생들과 함께 신학 공부를 더 한 후 그해 1844년 12월15일 이전에 페레올 주교로부터 탁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고 만23세의 나이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직자 반열에 들었다.
소팔가자는 김대건 부제가 편지에 장춘까지 널판지로 썰매를 만들어 타고 갔다는 기록을 남길 만큼 눈이 많고 추운 곳이다. 기자가 4월 중순이 지나서 소팔가자를 찾았는데 아직 마을 어귀 냇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영화 「붉은 수수밭」촬영장소로 사용될 만큼 광활한 수수밭이 펼쳐져 있는 소팔가자 가는 길에는 파종을 위해 농부들이 바쁘게 밭갈이를 하고 있었다. 이 곳 사람들도 개고기를 좋아해서인지 오토바이나 자전거에 개를 매단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곧게 뻗은 포플러 가로수 숲사이로 나 있는 신작로를 따라 소팔가자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월계수를 입에 물고 구름 위로 날고 있는 비둘기를 조형화한 마을 탑과 함께 조촐한 모습의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너무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길가에 의자를 내놓고 온 가족이 한 낮의 봄볕을 한가로이 즐기는가 하면, 광장 주변으로 빙 둘러앉아 장기판에 빠져있는 촌로들의 모습에서 평안함을 느꼈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 정취가 아마도 부모를 잃은 김대건과 최양업에게도 심적인 큰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 어귀의 냇가는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부모를 잃은 슬픔과 미쳐서 어디를 헤매고 있을지 모르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근심을 씻어내는 위안처가 되었을 것이다.
1백50여 년 전 김대건과 최양업 부제가 씻어냈던 무거운 마음을 거울로 비쳐주기라도 하듯 꽁꽁 얼어붙은 소팔가자의 냇가는 기자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로는 이 신작로가 옛길을 몇해 전에 넓힌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말을 미루어 볼 때 김대건과 최양업 부제는 아마 이 길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러 떠났을 것이고 눈 쌓인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수수밭을 가로질러 장춘을 왕래했을 것이다.
소팔가자 성당에 도착하자 곧바로 김대건, 최양업 두 부제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과거 신학교의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옛 소팔가자 성당은 1900년 의화단에 의해 파괴, 소실됐다가 1908년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이 곳에 있던 신학교는 1915년 길림으로 이전해 옛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역사의 단절을 뼈저리게 곱씹어야만 했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을 망각의 강으로 가라앉혀 버리는 단절된 역사의 무서운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소팔가자 성당 사제관에 있는 김대건 신부 석고상과 영정 상본이 옛 시간 속의 흐린 기억들을 상상하게 한다.
지난해 95년 김대건 신부 사제서품 1백50주년을 기념해 한국 교회사 연구소 역사탐방팀과 함께 소팔가자를 찾았을 때 제대 오른편 예수 그리스도상 밑에 모셔져 있던 김대건 신부 동상이 이젠 사제관 책상 옆 창틀을 꾸미는 장식물로 전락해 있었다.
지난해 95년 3월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소팔가자 주임신부로 부임했다는 진꾸 어렌 신부(金國聯ㆍ마태오ㆍ27)는 『김대건 신부 상이 너무 작아 성당에 어울리지 않아 사제관에 모셨다』고 했다.
『한국인 순례자들이 여름에 많이 찾아오지만 솔직히 자신을 비롯해 이곳 신자들이 김 신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한 진 신부는 『김대건 신부을 닮기 위해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소팔가자을 떠나오면서 『말씀은 묶이지 않는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입가에 맴돌았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