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로 불리는 충청도 내포(內浦)지역에서는 어느 곳보다도 많은 유명·무명의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그 중에서도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주, 영장이 다스리던 해미와 홍주 등은 그들의 단골 순교터였으니, 1792년 12월17일 원시장(베드로)이 홍주에서 옥사한 이래 1870년대까지 이들 세 곳은 오랫동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져 오게 되었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순교 사실은 유달리 관찬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홍주의 면천 땅(지금의 당진군)에서 태어나 그 지방에 전파된 복음의 진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서울로 올라가 조선 교회의 밀사 역할을 하던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이웃에 전하였다.
그러던 중 1791년에 전라도에서 시작된 신해박해의 여파가 서울과 충청도 등지로 확대되면서 홍주 고을에서도 신자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박해 때 서울과 지방에서 유명한 교회 지도자들이 안타깝게도 배교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라우렌시오와 같이 용감한 신자들도 있었음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라우렌시오의 행적은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는냐?』고 하면서 관장에서 당당히 호교론(護敎論)을 편 것을 시작으로 교회사에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웬만한 신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이 일로 즉시 면천 감옥에 투옥되었고, 이어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당당한 호교론자에겐 아무 것도 통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가 고을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터였으므로 관장도 하루 빨리 다른 곳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라우렌시오는 해미·홍주 진영으로 이송되면서 신앙을 증거하고 형벌을 받게 되었지만, 조정의 조치로 석방되고 말았다.
이후 내포 지역은 여러 해 동안 평온하였다. 비록 1795년에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영입하였다는 죄로 지황이 순교하였지만, 그 여파가 라우렌시오에게까지 미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 충청도 관찰사가 도내에 명령한 박해로 인해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라우렌시오도 그가 이전에 보여준 용맹성과 그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즉시 체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8월에 면천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라우렌시오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포졸들이 그 대신 아들을 체포해 가자 그는 곧 은둔처에서 나와 자진하여 관장에게 나아갔다. 그리고는 관장의 문초에 대해 십계명의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 계명에 따라 『천주를 공경하고, 다음에는 임금님과 관장과 부모와 어른들을 모두 공경하며, 친구와 은인과 형제들과 다른 사람들을 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뒤 형벌을 달게 받았다. 이때 그가 믿음으로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공로, 부활과 재림, 그리고 천주교의 온갖 교리 내용은 박해자들의 말문을 막기에 충분하였다.
면천 관아에서 갇혀 있던 기간은 모두 7개월간이었다. 그 동안 라우렌시오는 공식적으로 네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옥졸들에게서 받은 고통이 더 컸었다. 뇌물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1798년 초에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해미에서의 문초와 형벌은 더욱 가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약 1년 동안 게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마침내 영장은 관찰사로부터 매질을 해서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낸 뒤, 일주일이 멀다하고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옷을 벗긴 다음 상처 입은 몸을 진흙 속에 내버려두어 밤새도록 추위를 겪고 비를 맞게 한 적도 있었다.
이 무렵 라우렌시오는 모친께 보낸 옥중 서한에서 십자가의 발현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는 다음날부터는 승리의 시각을 헤아리면서 계속하여 매를 맞았지만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그가 옥사장이에게 목을 졸라 죽이면 될 것이라고 말하자 옥사장이 즉시 이 말을 따랐으니, 그때가 1799년 2월29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내포 지방의 못자리에는 또 하나의 순교의 씨앗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그가 순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면천 땅에는 신앙의 행렬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한 세기가 지난 뒤에는 여러 곳에 공소가 설립되어 다시 한세기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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