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이 머리가 지둔(遲鈍)하고 명민(明敏)치 못한 사람은 촉발생심(觸發生心)이나 응시소매(應時小賣)격으로 시를 써 가지고선 사물의 실재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존재의 무한한 다면성이나 복합성을 인식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작시 선집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미래문화사 간)을 펴낸 구상 시인은 스스로 연작시를 많이 쓰는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제재나 주제를 가지고 응시와 관찰과 사색을 거듭함으로써 관입실재(觀入實在)에 도달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
모두 5부로 나눠져 있다. 1부 「까마귀」는 70년대 이후 물질만능과 기능주의로 치닫는 시대 상황에 대한 경고이고 2부 「밭일기」는 생성과 소멸이 되풀이되는 원초적 삶의 터전으로서 밭에 대한 집중이다. 3부 「그리스도 폴의 강」은 사물과 존재의 내면적 실재에 대한 인식의 추구이고 4부 「초토(焦土)의 시」는 6ㆍ25의 비극적 체험을 보편적 차원에서 증언한 것이다. 마지막 5부 「모과(木瓜) 옹두리에도 사연이」에서는 90편의 자전적 연작시들이 담겨있다.
한국 시단에 존재의식과 역사의식의 시 세계를 구축한 원로 구상 시인의 연작시는 바로 존재와 역사의 치열한 탐구 방편의 하나로 생각된다. 고밀도로 농축된 시어로도 존재와 역사의 심오한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는 데엔 한계가 있다는 말인 듯 싶다.
하지만 구상 시인의 빼어난 시세계는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과 삶이 일치를 이루는데 있다는데 많은 사람들은 지체없이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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