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시대 전반기 한 세기 동안 내포 지역에서는 언제나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또 다른 순교자를 낳게 하였다. 따라서 이들에 관한 우리의 순교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 중에서 순교사의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1791년에 최초의 공식적인 박해가 일어났을 때 내포 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배교하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석방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일한 순교자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가 곧 원시장(베드로)이었으며, 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또 다른 순교자가 있었으니 그의 사촌 형인 원 야고보였다.
홍주(洪州) 고을 응정리(鷹井里, 또는 을전)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원(元) 베드로와 야고보는 환갑을 전후하여 함께 복음에 대해 듣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원시장 베드로는 교리를 더 세밀히 궁구한 끝에, 그것이 영원한 삶의 약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집안과 주변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따르도록 권고하였다. 이때 그를 알던 사람들은 사납고 야성적이던 그가 자신의 성격을 극복하고 온화한 성품을 보이며,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착한 표양을 나타내는데 감동하여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사촌 형 원 야고보는 본래 성품이 어질고 순직하였던 탓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즉시 애긍 시사에 열중하였고, 금요일의 금식재를 철저히 지킴으로써 이전의 죄를 기워갚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신해박해가 거의 끝나가던 1792년 말에 홍주 영장은 그들 형제의 소식을 듣고는 우선 포졸들을 보내 형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났으니, 친구들의 권고를 받은 야고보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 대신 베드로가 포졸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형 야고보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대신 같은 천주교 신자인 자신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곧장 영장 앞으로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누구 못지않은 신앙심을 나타냈고,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옥에 가두고 신문하도록 하였고, 죽일 작정으로 여러 차례 치도곤을 치고 주리를 틀었다. 이로 인해 수족을 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리어 기쁜 마음으로 옥졸과 포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옥으로 찾아 온 한 신자로부터 영세를 받을 수 있었으니, 그때까지 그는 예비 신자에 불과하였었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마지막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천주께서 여기 계셔서 저를 더욱 굳세게 해주십니다』라고 말할 뿐 동요하지 않았다. 화가 난 관장은 그를 귀신이라 여기고, 몸에 물을 부어 밤중에 얼려 죽이려고 하였다. 이러한 형벌 가운데서도 그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만을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로써 목숨을 바치니, 그때가 1792년 12월 17일(음력)로, 그의 나이 61세였다.
베드로의 영광스러운 순교는 그의 형 야고보에게 신앙의 큰 힘이 되었다. 야고보는 이때부터 순교의 원의를 품고는 드러내놓고 신심활동을 하였으며, 주문모(야고보)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신부에게 가서 성사를 청하였다. 당시 그에게는 첩이 있었는데, 그 자신은 이것이 교리에 어긋난 일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 신부는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해 준 다음, 첩을 두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서야 성사를 주었다.
이후 원 야고보는 박취득(라우렌시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순교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에 충청도의 박해가 발생하였고, 이듬해 야고보는 덕산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에 갇혔다가 홍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덕산으로 이송되었으며, 감사의 명에 의해 목사가 주재하던 청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동안 야고보는 밀고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갖가지 형벌을 당하여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야고보는 또 청주로 이송되기에 앞서 찾아 온 가족과 친구들에게 『천주를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써야지, 속세의 정을 따라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장차 천주대전과 동전 마리아의 곁에서 함께 만날 수 있도록 하자』고 당부하였다. 그런 다음 청주에서 재차 매를 맞아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799년 3월 13일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 기적을 목격한 외인 50여 가족이 그를 따라 입교하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순교 후의 기적이 사도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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