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 지역의 박해가 계속되면서 삽다리(揷橋)라고 불리는 덕산현(德山縣)의 주례(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서 태어난 인은민(인, 마르티노)과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에서 태어난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이 1799년 12월15일에 함께 순교하여 하느님 품안으로 올라갔다.
당시 마르티노는 63세, 그의 아들벌인 프란치스코는 27세였다.
마르티노는 양반집안 출신으로 학문을 닦다가 진사 출신의 황사영(알렉산델)과 친분이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입교하자마자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단지에 넣어 삽교천 강물에 던져 버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야고보)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아들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놓은 다음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여 생활을 하였다. 물론 그의 친구들은 이러한 마르티노의 행동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그가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도리를 설명하였으나 세속에 깊이 물든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할리 만무였다.
1797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마르티노는 이미 신자로 이름이 드러나 있었으므로 즉시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한다는 원의를 나타냈다. 이후 그는 감사의 명대로 공주와 청주, 해미옥으로 장소를 바꾸어 가면서 갖은 형벌과 고난을 받아야만 하였다.
해미로 이송된 후에도 그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러므로 영장은 그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없음을 알고는 때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포졸들은 이 명에 따라 돌로 온 몸을 쳐서 턱뼈와 갈비뼈를 부수고 온 몸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목숨은 서서히 꺼져 갔지만 마르티노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목숨을 바치는 거야』라고 여러 차례 되뇌이면서 마지막까지 영광을 드러냈다.
바로 그 직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모양으로 프란치스코가 순교자의 용맹스러움을 보여 주었다. 그는 부유한 평민 출신으로 일찍 부친을 여의고 온갖 정욕을 충족시키며 생활하던 중, 24세때인 1797년에 황심(토마스)으로부터 천주교의 신앙에 대해 듣고는 그 진리에 혼연히 기울어져 따르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얼마 안되는 시간안에 어떻게나 그의 성품이 변했던지,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그에게서 감화를 받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열심은 날이 갈수록 배가 되었다. 전교활동에 노력하여 가족과 친구들을 입교 시켰고, 고행과 이를 통한 보속행위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언제나 『천주를 섬기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는 금욕을 실천하든가 순교로써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하면서 순교를 각오하였다. 이렇게 그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른지 몇달 후에 박해가 일어 났다는 소식이 황모실까지 전해졌다. 프란치스코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가족과 교우들을 권면하였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느 날 그는 포졸들이 올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 천상잔치를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세속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였으니 바로 예비 순교자의 예견대로였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프란치스코는 관장의 신문에 아무 것도 고발할수 없다고 하면서 몸으로 형벌 받기를 즐겨 하였다. 그리고 감사의 명령에 따라 해미 진영으로 이송된 후에도 주뢰와 주장질을 겁내지 않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수난의 신비를 영장과 형리들에게 자주 설명하곤 하였다.
마침내 감사는 영장의 보고를 받고는 매를 쳐서 죽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영장이 판결문을 프란치스코에게 내밀었을 때 그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거기에 서명하였고, 형장으로 옮겨져 죽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마찬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리들은 그리 많은 매질에도 그가 죽지 않자 마지막으로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그 날의 잔치를 끝내고 말았다.
며칠 후 마을 교우들은 프란치스코의 시체를 거두었을 때, 그 얼굴이 아주 싱싱하고 웃음까지 띠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본 많은 외교인들이 입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마르티노의 탄생지인 주례 공소의 신자들은 1967년에 삽교본당이 설립되면서 공소가 폐지되자, 이전의 강당 자리에 순교자 사적지를 건립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3년 후인 마르티노의 순교 2백주년을 기리기 위한 순례 기도 행사를 전개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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