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호를 타고 조국을 향해 서해를 항해하던 중 김대건 신부는 문득 마카오에서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동양함대 에리곤호를 타고 조선을 향하던 일이 떠올랐다.
1842년 2월15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승선하면서부터 김대건 신부의 기나긴 귀국여정이 시작됐다.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함선에 승선하게 된 이유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희망했던 프랑스 정부가 그들의 의사를 전달해 줄 통역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교구의 사목을 책임지고 있던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도 조선과 프랑스의 통상을 강력히 희망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목적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먼저 박해로 선교사들이 모두 치명해 모든 연락이 두절된 조선 교회의 현재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는 1832년 2월 26일 구슬랍 목사를 태운 영국 상선 한 척이 마카오를 출발해 같은 해 7월17일 조선에 도착, 왕에게 헌상품을 바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감자 수백 개를 조선 연안에 심어 놓고 떠난 사건이 발생, 조선에 유럽 상인들과 개신교 목사가 들어가기 전에 먼저 천주교 선교사를 입국시켜야 한다는 초조감이 작용했다.
어쨌든 당시 신학생이던 김대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의 명에 따라 프랑스 함대에 승선, 조선을 향해 떠났다.
또한 동기인 최양업도 다섯 달 후 1842년 7월17일 브뤼기에르 신부와 함께 빠쥬 선장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했다.
조선을 향하던 세실 함장은 중국 상해에 도착해 에리곤호를 정박시키고 인근 남경(南京)에서 있을 영국과 중국의 「남경조약」조인식을 참관하고자 남경으로 떠났다. 물론 김대건도 동행했다.
아편전쟁에 패배한 중국이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자리에 김대건 신부는 유일한 조선인 목격자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중국은 남경조약에서 홍콩섬의 소유권과 전쟁 비용으로 2천1백만 량의 배상과 5개 항구를 개방하고 체류권을 영국에 주었다.
제국주의 국가가 휘두르는 힘의 논리 앞에 무참히 짓밟히는 거대한 중국을 보면서 김대건 신부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김 신부는 또 조인식을 보면서 열강들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 앞에 조국인 조선이 주권국가로 살아남기 위해선 개화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확신이 관군에 의해 체포된 후 무지한 조선 정치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옥중에서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경(南京)은 청년 김대건에게 개화사상을 싹 틔우게 한 교훈의 현장이었다고 해도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착잡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남경시내의 많은 곳을 관광했다.
상해에서 2백76㎞떨어져 있는 남경(南京). 인구 2백50만에 유동인구만 50만 명으로 남경 군부가 자리잡고 있는 군사도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남경은 한 때 중국 대륙의 수도(首都)로 천하의 중심이 됐던 옛 명성의 흔적들을 군데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화혁명으로 대부분의 유적들이 파괴돼 남경을 처음으로 찾는 방문자에게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1842년 8월 29일 남경 양자 강변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에서 남경조약 조인식이 체결되기 전 회담이 있었던 영보사(靈寶寺)를 찾았다. 남경공항에서 약 12㎞떨어져 있는 이 절에는 1928년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신해혁명」때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무량전(無梁展)과 1백10개의 비석과 3만3천2백24명의 전사가 명단이 새겨진 비문, 순국기념탑이 있다.
이곳 영보사에서 회담을 가진 영국과 청나라 대표들은 오늘날 남경 중산부도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손문의 유해를 가져오기 위해 새로 만들었다 해서 「중산부도」로 이름 지어진 이곳은 현재 해군기지가 들어서 있어 외부인들에게는 일체 개방돼 있지 않고 여객을 위한 항구 일부만을 개방하고 있다.
김대건 서한에 기록돼 있는 남경 보인사를 찾기 위해 아무리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혁명사만을 배운 오늘날 중국인들은 과거 중국역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스님들마저 남경에 어떤 절이 있었는지 모를 만큼 철저하게 과거사와 단절돼 있었다.
남경에 오기 전 북경대학 도서관장으로부터 자문을 구한 것을 토대로 유추해 본 결과 「보인사」는 아마 남경 중화문 밖 고장간리(古長干里)에 위치한 영락 10년 1412년 창건한 「대보은사」(大報恩寺)가 아닌가 짐작됐다.
이 절에는 유리벽돌로 짓고 2천 냥 황금으로 탑 꼭대기를 세운 9층8각 탑인 「대보은사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 장문에 걸쳐 설명한 탑과 흡사하다.
18세기 유럽 문헌에 세계 기적의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이 탑은 1856년 모두 파괴되고 현재 그 탑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우 비석 2개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계명사 7층8각 탑이 이 탑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라고 한다.
오늘날 남경조약 조인식 현장에 있었던 김대건 신부에 대해 일부 사학자들은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진정한 역사적 사실과 선교사들의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반박하고 싶다.
왜냐하면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단 한가지의 목적으로 자기 생명을 온전히 희생할 만큼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의 장래를 축복했기 때문이다.
1866년 순교한 성인 베르뇌 장 주교의 편지 내용으로 그 증거를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우리 조선을 서양인이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프랑스 군함도 싫고, 프랑스 군인도 싫고, 프랑스 외교관도 싫다. 비록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종교의 자유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괴로움을 달게 여기며 이 가다꼼바 안에 남아 있겠노라. 우리의 피는 흐르리라. 우리 신입 교우들의 피도 계속해서 흐르리라. 치명자의 피는 교우들의 사도니라』
남경조약 조인식 현장에 있었던 김대건 신부도 베르뇌 주교의 심정과 똑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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