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1797년의 박해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름 없이 불려지던 이 박해에 「정사박해」(丁巳迫害)라는 고유의 명칭을 붙여 주어야만 하겠다. 그보다 2년전인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북산사건(北山事件)으로 인해 야기된 박해가 최근에 와서 『을묘박해』로 불리는 것처럼. 아울러 우리는 이 정사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지만, 그중에서 몇 안되는 순교자만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정사박해로 1799년 2월에 해미에서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과 1799년 3월에 청주에서 순교한 원 야고보에게는 절친한 친구 2명이 있었으니, 방(方)프란치스코와 정산필(鄭山弼, 베드로)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네 명은 일찍부터 열심한 신앙으로 맺어져 함께 순교하기 위해 서로를 밀고하기로 약속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하는 이야기일뿐 그들은 서로를 밀고하거나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 중 프란치스코는 박취득과 같은 고향인 내포의 면천(沔川)에서 태어나 감사의 비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가 입교한 시기에 대하여는 알려진 사실이 없지만, 아마도 고향 인근에 널리 퍼져 있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들은 것이 입교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신자가 된 후 그의 열성은 교우들 가운데서 뛰어났으며, 평소에도 간절히 순교하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던 중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1798년에 홍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코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어느 기록도 우리에게 그의 용기와 신심을 정확히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형을 앞두고 있을 때 옥 안에는 교우 두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옥졸들이 마지막 음식을 가져오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프란치스코는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지만, 사또가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 또 기회를 얻지는 못할 것이오』
이 용감한 말은 주님의 도움을, 효력을 얻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의 두 동료들은 마침내 나약했던 마음을 뉘우치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어 있는 거룩한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그런 다음 셋이 함께 옥사로 순교하니, 때는 1798년 12월16일(음력)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신앙 동료였던 정산필(베드로)은 덕산 고을의 양민 출신이었다. 입교하기 전에는 성격이 격렬한 데다가 힘까지 세어 모두가 그를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한 뒤에는 겸손하고 친절해져 모두가 그를 칭찬할 정도가 되었다. 다행히 그는 어느 날 호서 지방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주던 주문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릴수 있었다. 당시에는 주 신부가 아주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었다. 세례를 받은 베드로는 얼마 되지 않아 내포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기도와 신심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전력을 다해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베드로가 체포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1798년이나 이듬해에 덕산 관아로 끌려가 많은 문초와 형벌을 당한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때 그는 용감하게 천주를 증거한 뒤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결안에 서명하였다. 또한 옥중에서도 함께 갇혀있는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최후의 음식을 먹으면서는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어야 하오. 그런다음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거요』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니,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 아니면 60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에는 비록 무명 순교자는 아닐지라도, 기록이 미흡한 순교 선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순교를 의심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해자들의 강요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그분들의 시복을 위해 아주 작은 자료라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확정된 세부행사 내용
◉ 유해 순회 기도
◉ 9일기도
◉ 축일 특별강론
◉ 일대기 강론 및 피정
◉ 시복시성 준비를 위한 묵주기도 7천만단 봉헌운동
◉ 표어공모
◉ 순교 1백50주년 기념 공식기도문 확정
◉ 교구청 국별 행사
◉ 한국 교회사 연구소 주최 전기 자료집 발간 및 자료전
◉ 시복시성 운동
◉ 교회사 자료 번역
◉ 장학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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