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영성을 위한 성사
성령체험의 방식인 성사(下)
① 창조적 회개(metanoia)
첫 번째 공동체는 회개한 이들, 즉「전향자」들이 이룬 공동체였다. 전향자들은 마음과 생각의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어제의 자신들이 아니라 오늘 새롭게 변형된 이들로서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그와 같이 전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던가? 성령이시다. 성령은 공동체에 들기 이전의 사람들이 전향할 수 있도록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시고(요한 16, 13)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그들에게 해 주신 말씀들을 모두 되새기게 해 주심으로써(요한14, 26)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터를 잡으신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비롯해서(갈라 4, 6)『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인식하는 가운데 고백까지 할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이다(1 고린 12, 3).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창조적 활동을 이것으로 끝마친 것이 아니다. 전향자들의 공동체는 항구하게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묵시 2, 5. 16.21~22: 3, 3, 19참조) 이때에도 역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게 하여 공동체가 줄곧「새 창조물」이 되게 하시는 분은 역시 성령이셨다.
첫 번째 공동체는 성령께서 창조적으로 활동하시도록 해 드림으로써 그분에 의해 자신이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이들의 공동체로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바로 이런 측면을 직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도 20세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서『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교회헌장 8~9항)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② 종말적 근거(martyria)
회개와 성령 그리고 증거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내용이다. 증거는 항상 외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확실성을 증명할 수 없고 또 비록 있는 것일지라도 생활한 것일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첫 번째 공동체는 자신이 전향자 공동체임을, 그것도 성령에 의존하는 전향자 공동체임을, 그런가 하면 자신이 표현하는 증거 행위 자체가 성령에 의한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 공동체는 자신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분을 세상 안에서도 선포라는 방식으로 증언했는데 그 때 그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감동시키신 분이 바로 성령 이셨다(사도 2,14~36)
하지만 공동체의 증언은 고통을 초래하기도 하고 박해를 동반하기도 하며(묵시 1, 9)심지어 죽음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것이었다(사도 22, 20). 그러나 첫 번째 교회 공동체가 증언을 통해서 행하는 그러한 증거 행위는 어쨌든 성령에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예를 법정에 섰을 때의 베드로와 요한(사도 4, 9: 5, 32)그리고 스테파노의 설교와 죽음(사도 6,8~10: 7, 55)사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공동체는 자신의 증거 행위가 성령의 종말 지향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음을 체험하며 살았던 것이다.
③ 종합: 회개와 증거의 동시성
회개와 증거 행위는 불가분하다. 그 관계는 믿음과 믿음의 행위 사이의 것과 같다. 따라서 증거 행위가 없는 회개는 마치『행동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야고버 2, 14~26)인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요컨대 증거 행위는 회개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회개한 이들 즉 전향자들이 이루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동시에 증거자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자기 현존과 삶의 합목적성을 성령의 활동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교회 공동체의 정신은 회개와 증거 행위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창조·종말적인 활동에 자신을 맡기는 그러한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④ 맺는 말
그리스도를 명분으로 하고 성령에 의해 생명을 얻어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또한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주시는 그 창조·종말적 생명을 확산시켜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활동 목적인 하느님 나라의 가시화를 실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신이다.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해 드리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정신인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자신이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분께 문을 열어 놓고 또 우리와 함께 사는 세상 사람들 안에 계신 그분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그분께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기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기도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가시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도하는 공동체만이 세상의 여타 단체와 구별되는「성사들」의 공동체이자「성사자체」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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