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신부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조정에서는 그의 종적을 뒤쫓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곳으로 포졸들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박해자들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주 신부는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고, 비밀리에 회원들을 임명하여 활동하도록 하였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 바로 초대 명도회 회장이었는데, 최필제(崔必濟, 베드로)와 정인혁(鄭仁赫 또는 麟爀, 타대오)또한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복음 전파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최필제(베드로)는 바로 1801년 4월8일(음력 2월26일)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최필공(토마스)의 사촌 동생으로 서울의 외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21세 때인 1790년에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즉시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는데, 그때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정인혁(타대오)과 이존창(루도비코곤자가)이었다. 타대오 또한 서울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 베드로와 인척간이었으며, 그들이 일찍부터 가깝게 지내면서 교리를 전수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입교한 지 얼마 안되어 신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최 베드로와 정 타대오는 다른 9명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모두 함께 형조에서 배교한 뒤 석방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그 뒤부터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으나 베드로와 타대오는 배교한 사실을 뉘우치고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천주교의 모든 법규를 다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타대오는 부친과 형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 천주교를 끊도록 하였지만 이러한 세속의 정을 물리치면서까지 신앙을 실천해 나갔으며, 베드로 또한 부친이 그를 교회로부터 떼어내려고 노력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베드로와 타대오는 명도회의 하부조직인 육회(六會)의 일원으로써 김이우(바르나바)의 집을 집회장소로 정하고 매달 7일에 함께 모여 교회 서적을 읽거나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듣곤 하였다. 이때 남자 교우들은 방안에서, 여자교우들은 문밖에서 미사에 참례하였는데, 그들이 사용하던 서적들은 주로 총회장인 최창현(요한)이 필사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후 그들은 감시가 심해지게 되자 서울의 대로변에 약국(藥局)을 차려놓고는 그 집을 집회장소 겸 연락처로 이용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포졸들이 부근을 지나가다가 교우들이 축일을 지내면서 가슴을 치는 소리를 투전 치는 소리로 알고는 체포할 양으로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포졸들은 이내 교우들의 몸에서 축일표(祝日表)를 발견하였지만, 글을 알 수 없었으므로 다른 동료에게 물어보려고 그곳을 떠났다. 그 사이에 다른 교우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얼마 안되어 포졸들이 축일표가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약국으로 왔을 때는 베드로와 오현달(스테파노)이라는 교우만이 그곳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날이 바로 1800년 12월 19일(음력), 주의 봉헌 축일이었다.
최필제(베드로)는 즉시 형인 토마스와 함께 포도청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토마스가 참수를 당해 순교하자 그를 장사 지낼 수 있도록 일시 석방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때 관리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도망하라고 넌즈시 일러 주었지만, 베드로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친구들에게『나는 마귀에게 용서를 갚고, 전에 한 배교를 보속받기를 원하네. 내게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내 머리를 바치는 것일세』라고 하면서 순교의 결심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장례를 마치자 스스로 옥으로 돌아와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한편 그의 동료 정인혁(타대오)은 앞서 약국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가 3월21일(음력 2월9일)에 그의 뒤를 쫓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이곳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의 권유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몸이라고 비난하면서 교리를 널리 전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는 형관의 말을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다. 이미 순교할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명도회원인 두 동료는 함께 체포되어 배교하였다가, 함께 배교를 뉘우치고 언제나 같이 교회 일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서소문 밖 형장에서 한몸으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게 되었으니,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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