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평협 회장단과 각 교구 평협 회장단을 비롯해 12개 교구 160여 명의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16~18일 사흘간 제주교구 일원에서 펼쳐진 ‘시복시성 기원 제주 도보성지순례’는 125위의 시복시성을 염원하는 평신도들의 열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신앙 쇄신을 향한 새로운 디딤돌을 놓은 장이었다. 특히 제주 도보순례는 자연에 깃들인 하느님의 숨결과 그 안에 배인 섭리를 새롭게 깨닫는 자리이기도 했다.
손에는 묵주를, 가슴에는 열정을, 머리에는 신앙을 담아 이뤄진 제주 도보성지순례를 이모저모와 화보로 돌아본다.
◎… 16일 오후 제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주례하는 개막미사로 서막을 열 예정이었던 순례의 여정은 갑작스런 기상 악화로 순례단이 탄 비행기가 회항하면서 일정이 순연되기도. 갖은 어려움과 고비를 넘기고 뒤늦게 봉헌하게 된 미사여서 순례자들의 마음도 남달랐다. 이날 미사에서 강우일 주교는 “비록 ‘하느님의 종’ 125위가 시복은 안 됐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에게 미리 충분한 상을 주셨다”면서 “오늘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느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묵상하면서 순례에 임하자”고 당부했다.
부인 이강옥(로사·57)씨, 딸 이보라(요안나 바올라·28)씨와 함께 순례에 함께한 이건국(베드로·62·수원 율전동본당)씨는 “하느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가운데 신앙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면서 “숱한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낸 신앙선조들이 믿음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 실질적인 제주 도보순례는 둘째 날, 성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를 타고 귀국하다 표착한 용수성지에서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이날 순례에는 제주교구 신자 180여 명도 함께해 시복시성의 열기를 더했다. 앞서 제주 신창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김대건해안로가 포함된 4.6Km 구간을 걸어 성지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성 김대건 신부와 새롭게 만났다.
고령에도 순례길에 기쁘게 임한 황기진(바오로·79·서울 연희동본당) 회장은 “한국교회를 위해 ‘라파엘 호’를 타고 거센 풍랑을 헤쳐 온 김대건 성인의 삶 자체가 기적이자 은총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내적 성찰을 통해 신앙을 더욱 살찌우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신창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김대건해안로가 포함된 4.6km 구간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
▲ 순례단이 성 김대건 신부가 표착했던 용수성지에서 출발 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여정에 함께한 허승조 신부(제주 신창본당 주임)는 “성지순례는 감실 안의 주님이 아니라 길에 서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라며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부르심을 받고 있는지 묵상하고 세상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자”고 말했다.
◎… 둘째 날 순례의 마지막 코스는 제주 해군기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강정마을 중덕해안, 순례자들은 경찰들로 넘쳐나는 마을을 거쳐 구럼비 바위가 바라보이는 강정포구 방파제에서 아픔의 현장을 눈과 가슴에 담았다. 지난해 우연히 강정마을에 들렀다가 평화활동가로 강정에 살고 있는 연극인 방은미(요한네스 보스코·52)씨는 “국가권력에 고통 받는 주민들의 삶을 알고도 눈을 감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신앙을 포기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 떠나지 못하고 있다”며 “찬반을 떠나 우리 시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광야에 많은 이들이 찾아 함께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주평협 문덕영(알렉산더) 회장은 “강정에 올 때마다 사회문제와 폭력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면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묵상하는 계기가 되길” 기원했다.
▲ 강정마을 중덕해안에서 한 신자가 기도를 바치고 있다. 순례자들은 해군기지 공사 현장을 목격하며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환갑을 맞아 미국에서 일시 귀국해있던 중 순례에 참가하게 된 심재숙(데레사·60·미국 애틀랜타한인본당)·조용후(루카·72)씨 부부는 “인생에서 가장 뜻있고 아름다운 여행이었다”면서 “이번 순례를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 올레길 19코스를 따라 걷고 있는 순례자들. 고르지 않은 날씨에도 신앙선조들의 시복시성을 향한 이들의 열기를 꺾진 못했다. 참가자들은 이번 125위 시복시성 기원 도보성지순례를 통해 자연에 깃들인 하느님의 숨결과 그 안에 배인 섭리를 새롭게 깨닫는 시간을 가졌다.
최연소자인 정민교(7)군, 정은교(유스티나·초교 3)양과 끝까지 순례 일정에 함께한 조영미(로사리아·43·대전 노은동본당)씨는 “신앙 안에서 다른 교구 형제들과 한길을 걸을 수 있어 기뻤다”면서 “이번 체험이 소중한 밑거름이 돼 앞으로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새미은총의 동산에 있는 십자가의 길에서 125위 시복시성을 기원하며 기도를 바치고 있는 순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