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 고을은 인근의 양근, 광주 등과 함께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18세기 무렵, 중앙관계에서 멀어진 남인계 학자들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학문을 닦다가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는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것이 점차 이웃의 여러 양반 계층으로 전해진 때문이다. 특히 여주 고을에는 한국교회 최초의 밀사로 활약했던 윤유일(바오로)의 집안이 있었고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의 집안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최창주(마르첼리노)는 「여종」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여주 고을의 양반으로 40대 초반에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온가족을 입교시켰다. 그러다가 1791년의 신해박해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순교의 피로써 은총을 받기위해 노력하였으며, 가족과 이웃 교우들을 힘써 권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으니, 그 사위 중의 하나가 여주 고을 출신의 원경도(尹경道, 요한)였고, 다른 딸 최소사(발바라)는 신태보(베드로)의 며느리가 되었다.
원경도(요한)는 여주 고을에 낙향해 있던 소론(小論) 집안 출신으로 사촌인 이중배(마르티노)와 함께 24살 되던 1797년 무렵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교리를 전해 준 인물이 바로 김건순(요사팟)이었는데, 요사팟은 이에 앞서 서울에서 주문모(야고보)신부를 만난 뒤에 신앙을 받아들여 고향인 여주에 전파하였었다.
신해박해 이후 여주 고을에 다시 박해가 몰아친 것은 1800년 봄이었다. 아직 공식적인 박해령이 있지는 않았으나 그곳 관장은 언제나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은밀히 교우들을 색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차에 교우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는 밀고를 받고는 즉시 포졸들을 보내 체포하도록 하였다.
요한은 마침 부활 축일을 맞이하여 여러 교우 가족들과 함께 개를 잡고 술을 장만한 뒤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삼종경」(三鍾經. 즉 喜樂經)을 외면서 신심행사와 친교의 나눔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이렇게 하여 여주 관아로 압송되던 일행이 요한의 집을 지나치게 되자 그의 노모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포졸들에게 부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박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였다. 힘을 얻은 관장은 더 많은 교우들을 색출하도록 임의대로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다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중에는 이전의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를 결심해 온 요한의 장인 최창주(마르첼리노)도 끼어 있었다. 마르첼리노는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이 도망갈 것을 권유하자 이를 거부하였지만, 늙은 모친까지 도망할 것을 간청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피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난 길을 떠나자마자 이전의 배교를 뉘우치면서 맹세했던 신심을 다시 되찾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마르첼리노는 집으로 돌아온 날 밤에 즉시 체포되어 여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단호히 밀고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런 다음 사위가 갇혀 있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6개월 이상이나 옥중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자 관장은 옥중의 교우들을 하나 하나 끌어내 배교를 강요하면서 다시 신문하였다.
이제 형벌은 점점 더 가혹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장인과 사위는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북돋워 나갔다. 특히 요한의 몸은 거듭되는 형벌로 헤어지곤 했지만,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다시 낫곤 하였다고 한다.
또 늙은 여종이 옥으로 달려와 그의 노모와 부인이 슬퍼하는 정상을 전하면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는 여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교우들을 의금부로 압송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고, 마침내 형관은 「고향에서 처형함으로써 백성들을 경계토록 하라」는 해도정법(亥道正法)의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마르첼리노와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여주 관아의 남쪽 1리쯤 되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때 마르첼리노의 나이는 53세, 요한의 나이는 28세였다.
이후 이곳 순교터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이곳을 순례하는 사람이 없다. 사실 여주 남쪽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이 순교 터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드물었고, 게다가 이제는 몇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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