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노력한 선구자로 끝까지 신앙의 이름을 지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그중에서도 평신도 사도직의 전통을 세운 대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최창현(崔昌顯, 사도 요한)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신심에서나 덕망으로, 학식에서나 열심으로, 그리고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그는 초기 교회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남인출신 재사들과 교류
1759년(영조 35)역관(譯官)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성장한 뒤 남인 출신의 재사들과 교류하면서 학식을 쌓아 나갔다. 그의 집이 입정동(笠井洞)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마을 이름에 빗대어 「관천」(冠泉)이라 불렀다. 이후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784년 겨울이었다. 그러니까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자 요한)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한 두 달 만에 있은 두 번째 세례식에서였다. 이때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집안 아저씨뻘인 최인길(마티아), 지황(사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김범우(토마스)등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최창현 요한은 특히 두 가지 면에서 탁월한 공적을 쌓았다.
그 하나는 읽기 어려운 한문 교리서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한 점이었다. 이러한 교리서 번역 활동은 교회 초창기에 그토록 빨리, 그토록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교리가 널리 전파되도록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한문으로 된 주일과 축일의 복음 성서인 「성경직해」(聖經直解)를 처음으로 번역한 것도 그였으니, 이를 가리켜 『처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말을 하셨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심 함양과 교회활동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1785년의 명례방 사건으로 몇몇 지도자들의 마음이 약해졌을 때도 요한의 전교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과 함께, 양떼를 늘리고, 교회 안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회의 총회장으로서 1786년부터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도(假聖織制度)아래서, 초대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서, 성직자를 이 땅에 모셔들이는 계획에서 그는 자신의 중요한 직분을 다하였다.
요한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무엇보다도 먼저 교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는데, 평화로운 마음으로 모든 일을 삼가고, 공명한 자세로 매사에 정진하는 본 바탕이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었다고 한다. 요한의 집은 언제나 교우들의 집회소로 이용되었고, 그는 귀찮고 피곤함을 모르는 사람 같이 교우들을 따뜻하게 영접하였다. 교우들은 그로부터 몇마디 말을 들으면 곧 가슴이 시원하게 열렸고, 그의 교리 강론은 아주 자세하면서도 누구나 이해하기 쉬웠으므로 흠잡을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일찍이 초기 교회에서 총회장 요한만큼이나 교우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은 사람은 없었다.
존경과 사랑 한몸에
1795년 초 주문모(야고보)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그는 신부를 자신에 집에 모시고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박해자들로부터 지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오랫동안 신부를 모실 수는 없었다. 오히려 주 신부가 5년여 동안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비밀리에 활동하는 동안 그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던 중 질시가 극에 달한 박해자들이 1800년 말부터 지방의 교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이름이 「교우들의 우두머리」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아직 공식 박해령이 있기 전이었다. 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총회장 요한은 잠시 다른 교우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새해들어 몸이 불편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배교자 김여삼은 심약한 교우들을 거짓말로 꾀어 그의 집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1801년 1월9일(음력)밤, 마침내 배교자는 포졸들을 이끌고 요한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이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무서운 심문과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도 신심이 깊었던 요한은 형벌을 받는 가운데 잠시 마음이 약해져 몇몇 행적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끝내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사이에 그는 순교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마음을 굽히지 않았고, 포도청에서 한 모호한 말을 취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판관에게 호교론(護敎論)을 제출하여 천주교가 진리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런 다음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2월26일(양력 4월8일), 동료들과 함게 뜰채에 실려 서소문 밖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칼날을 받고 그 호교론을 자신의 피로써 봉인(封印)하였으니, 그때 나이 4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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