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1년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난 홍낙민(洪樂敏, 바오로)은 1784년과 1785년 사이에 즉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자는 성눌(聖訥)이었고, 교회 측 기록에서는 그의 세례명을 「루가」로 적은 경우도 있다.
홍유한이 당숙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학문의 동료였던 이승훈(베드로)으로, 이벽ㆍ정약전ㆍ 이총억 등 기호남인의 젊은 재사들이 모두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학문을 이어받고 있었는데, 그에 앞서 홍낙민도 1776년 무렵에 당숙인 홍유한(洪儒漢, 호는 농은)의 소개로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바오로는 이때 이미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었으므로 가족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치고 이를 따르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기호남인의 집안들과 사돈 관계를 맺고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그의 가족 중에서 훗날 바오로가 순교한 뒤에도 신앙을 지켜나간 경우는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순교한 셋째 아들 홍재영(쁘로따시오)뿐이었으며, 그의 아들 즉 바오로의 손자인 홍봉주(토마스) 또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서른 살 늦은 나이인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한 바오로는 그로부터 8년 만인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고, 이후 사간언 정언(正言, 정6품),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등 점차 높은 벼슬을 얻게 되었다. 반면에 그는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786년부터 시행된 가성직 제도 아래서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이웃과 친지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전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집안에서는 교리를 실천하고, 밖으로 나가면 일반 세속 사정을 돌보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그에게는 끝없는 심적 갈등이 되었다.
38세 문과급제 ‘만학도’
그에게 닥친 첫 시련은 1795년의 을묘박해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하고, 3명의 위대한 밀사들을 체포하여 포도청에서 장살한 뒤 다시 천주교 신자로 이름있는 몇몇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바오로는 이때 김종교(프란치스코), 이승훈, 황사영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으나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었다.
더욱이 그는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고 장차 집안과 나라에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고 하는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그 동안의 갈등이 엄한 형벌 아래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배척함으로써 배교자가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물론 바오로는 굳게 믿어 왔던 천주교의 진리를 일순간에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오히려 하느님의 섭리는 그를 순교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1799년 모친상을 당하였지만, 그는 집안에 신주를 들이지 못하도록 하였고, 가족들에게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바오로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과 함께 가장 먼저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관직에 있었던 탓에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 바오로는 몇 년 전에 배교하던 것과는 달리 신심과 통회와 진리에 대한 강한 믿음을 드러냈다.
『제가 섬기는 천주는 하늘과 땅, 천신과 인간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마태오 리치와 같은 선교사들은 우러러 볼만 한 도리와 성덕을 지닌 분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해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용기는 판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재판소에 모여 있던 관리와 형리들은 경악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내 바오로에게는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으며, 그의 몸은 매질로 으스러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였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는 『이제서야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하면서 이전의 배교에 대한 벌을 달게 받았다.
51세 서소문 밖서 참수
실제로 그의 마음은 천상의 영광을 얻는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마침내 판관들이 당시 순조 임금을 대신하여 국사를 농단하던 대왕대비의 명령대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여 얹은 바오로는 기쁨을 얼굴에 드러냈고,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하며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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