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 가정이 경상도에 피난 와서 살았던 일월산중의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우련전 신자촌을 찾기 위해서 애쓴 적이 있다.
5년 전에는 본당 중고등부 산간학교 답사차 나현승 스테파노 신부님과 함께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부근에 있는 등룡리 공소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우연히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운조) 비오 가문의 큰집 종손집안 후손들인 김용태 마지아, 김영수 사도요한, 회장들을 만났으며 그 후 이들과 함께 전주와 이리, 강경, 군산, 수원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들을 찾아 만나보았다. 그리하여 그 가정에서 각각 발행한 파보(派譜)인 부안보, 이리보, 강경보 등 가승보(家乘譜)와 경파보인 아현보 전주보 등 여러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였다.
이 자료들은 그 집안에서 지난 1995년 12월 대전에서 발행한 김해 김씨 안경공파 가승보(金海金氏安敬公派家乘譜) 발행에 다소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가승보가 되지 못하고 빠진 후손들의 집안이 많이 있어 그 후손들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하던 중 마침 1996년 7월 14일자 가톨릭신문 기사가 인연이 되어 김대건 신부의 삼촌인 제봉(濟鳳)과 제철(濟哲)의 후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대전교구 천안 쌍용본당 김선태 신부의 부친인 김종원 요한 회장을 만남으로써 이 가문들이 바로 그 후손들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또한 이분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가보(家譜)로 찾고 있던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순교자 김진후(운조)비오와 동생 귀조 그리고 김비오의 네 아들인 종현 택현, 순교자 종한(한현) 희현 및 후손들이 묻혀있는 문종선산을 찾았다.
이들은 7월8일에 이어 30일에 두 번째로 솔뫼성지의 윤인규 신부님과 함께 선영 산소에서 만나 선조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들의 만남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 사이에 피난 생활로 흩어져 서로 행방을 알 수 없이 남남으로 살고 있던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인 뜻 깊은 자리였다.
이 뜻 깊은 만님이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 순교 1백80주년과 김대건 신부의 순교 1백50주년을 맞아 이루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라 하겠다.
필자가 지금까지 이 가정의 후손들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은 첫째, 성 김대건 신부의 훌륭한 영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가문의 뿌리 깊은 신앙을 먼저 알아보아야 하며 둘째로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그 가문에 11명 혹은 12명의 순교자가 있는데 그 분들의 묘소와 순교행적을 찾아 기록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며, 셋째 지금까지 이 가문이 아직 김해 김씨 안경공파 족보에 완전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고 누락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즉 지금까지 우리는 김대건 신부 가문의 전체적인 신앙의 뿌리를 찾고 이해하기보다 김대건 신부 한 분의 사료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가문의 천주교 입교
이 가문이 처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지금까지는 1786년 당시 「가성직단」의 일원으로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 1752∼1801)에 의해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택현(金澤鉉 1766∼1830)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가족들이 입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여러 문헌 특히「사학증의」와 왕조실록인 「일성록」에 의해서 밝힌 바로는 이 가문이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1784∼1785년 3월 이전에 김진후(운조)의 아들 종현, 택현(김대건 신부의 조부), 한현(종한 안드레아), 희현 중에 맏이인 종현과 둘째인 택현이 이존창으로부터 입교를 권유받아 이존창과 함께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그 후 맏아들 종현은 1795년 입국한 주문모 신부에게 성서와 묵주를 받는 등 주 신부의 깊은 신임과 사랑을 받고서 열심히 포교활동을 했으며 부친 김진후(운조)는 1788년 경 관직에서 은퇴한 후에 천주교에 입교한 것 같다. 그리고 그 후 김진후(운조)는 1791년 신해박해 때 면천 고을 사람들과 함께 감옥에 갇혔으나 재판관들 앞에서 꾸준히 믿음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순교의 영광은 얻지 못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배교하지 않고 풀려났으나 그 후 4∼5 차례 홍주, 전주, 공주 등지서 붙잡혔다 풀려났다 하며 문초와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한편 맏이 김종현은 열심히 여러 지방으로 피난을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덕산 고을에서 아버지 김진후와 종현, 택현 등 형제들이 체포되었으나 김진후는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여 죽음을 면한 것 같다』(달레 저 한국 천주교회사 중권 46P).
그러나 그 후 그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10년 동안 해미감옥에 갇혔다가 1814년 10월20일(음력) 옥사했다. 그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한편 그는 감옥 안에서도 열심한 기도생활을 하며 훌륭한 표양을 보여서 포졸과 외인들에게까지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 맏아들 종현은 법망을 피해서 이미 신유박해 전인 1798년에 경상도 동북부 산악지대인 태백산맥의 일월산 중의 우련전(봉화군 재산면 갈산리)로 피난을 가 있는 셋째 종한(한현)의 집 등 경상도와 전라도의 심산궁곡을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1824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경상도 우련전에 이사 온 셋째 종한(한현) 안드레아는 1815년 을해박해 때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둘째 택현의 가정은 1827년 정해박해 때 난리를 피해서 서울 청파동으로 갔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한덕골로 가서 피난살이를 했다. 그때 김택현은 서당 훈장을 했으며 김대건 신부는 14세까지 글을 배웠다. 그리고 1839년에 기해박해 때 김택현은 난리를 피해 산중으로 피신을 다니다 굶어 죽었다.
그런데 그 후손 중의 일부 가문에서는 택현이 『감옥에 갇혔다가 굶어 죽었으며 순교자』라고 주장하나 확실한 문헌상의 증거는 없다.
부친 택현과 가족들이 한덕골에서 얼마간 살다가 아들 재준(재린)이냐시오는 산 넘어 골배마실로 이사 가서 살면서 부근 신자촌의 중심인 은이공소 회장직을 맡아 교회에 많이 봉사했다.
그리고 1836년 모방 신부가 은이공소에 와서 성사집행을 할 때 아들 김대건(지식)안드레아가 세례를 받고 즉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 때 김재준(재린)과 셋째집인 김종한(한현)의 딸인 김재신?(데레사)이 순교했다. 또한 부친 김택현과 숙부인 김희현도 순교한 것 같다. 그 후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김진후(운조) 가문의 후손들 중 김 신부의 삼촌인 김재항 루수와 사촌인 근식, 진식, 선식 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한 듯 하다.
가문의 순교자들
김진후(운조)가 1814년 해미에서 순교한 것을 비롯하여 1815년 을해박해 때 김종한(한현)이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1824년 해미에서 김종(한현)의 사위 손연욱 요셉 순교,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김재준 이냐시오와 김종한의 딸 김재신?(데레사)이 순교했으며 또한 부친 김택현과 숙부 김희현도 순교한 듯하며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김진후의 넷째 아들인 김희현의 아들인 김재항 루수가 순교했으며 그의 아들(광식, 경식)중 경식의 부인이 전주에서 순교했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삼촌인 김재철의 4형제(의식, 근식, 진식, 선식)중에 큰아버지 김재봉 집으로 양자 간 김근식 베드로와 그의 친형제인 김 프란치스꼬(진식과 선식중 한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가 순교했다.
그리고 김진후(운조)의 동생인 김귀조의 손자 김재교도 전주에서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이 가문에서 확실히 밝혀진 순교자만도 11명이 되며 김택현 김희현 김선식을 포함하면 14명이다.
그밖에도 다소의 순교자와 김대건 신부의 모친인 고 우술라 등 많은 증거자들이 있다.
선산의 발견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지난 7월14일자 가톨릭신문의 기사를 통해 그동안 가승보에서 일부 빠져있던 김대건 신부의 삼촌가족인 제봉과 제철의 후손들인 대전교구 천안 쌍용본당 김선태 신부의 부친 김종원 회장을 만남으로써 확실한 김대건 신부의 윗대 선산을 찾게 되었으며 또한 가승보에서 일부 누락된 후손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김 신부의 윗대 선조들이 묻혀있는 선산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은 1926년 발행한 족보상에는 대개 솔뫼에 묻혀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후손인 김용태 마지아와 필자가 경기도 용인, 충청도 솔뫼 부근 그리고 전라도, 경상도 등 여러 지방을 몇 년간 찾아 다녔으나 확실한 묘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김종원 회장과의 만남으로 그 분의 소개로 지금까지 대대로 이 선산을 관리하고 있었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에 살고 있는 김기태씨 가족을 만났다.
그리하여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순교자 김진후(운조) 등 선조들이 묻혀있는 선산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선산의 위치는 김기태씨의 마을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의 청용곡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선산에 묻혀있는 분들은 김대건 신부의 7대조 할머니인 파평 윤씨 묘를 비롯하여 6대조 정하(挺夏)부부와 5대조 의서(議瑞)부부의 묘소는 좌대석이 있어서 확실히 확인할 수 있으나 증조부 순교자 김진후와 그밖의 묘소들은 1968년 이장할 당시 확실한 묘적부가 분실되어 그냥 이장을 했으므로 정확하게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족보상에는 이곳에 증조부 순교자 김진후(운조) 등과 조부인 김종현, 택현, 회현 등 그 후손들의 묘소 약 30기 이상이 묻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장하는 과정에서 부부 합장을 하고 혹은 6기 가묘(아마 순교자의 묘인 듯 함)는 없애 버렸으며 또한 일부는 시신의 유골을 앞개울에 띄워 없애 버렸다 한다.
그러나 증조부 순교자 김진후(운조) 부부 합장과 김귀조 묘, 조부 종현, 택현의 묘 등은 확실히 지금도 이 선산에 묻혀 있어서 어느 정도 고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가문들의 후손들은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문중 파보 및 합동 경파보
각 파보에 대한 정확한 증언이 필요한 이 가문에서 발행한 각 파보들을 보면 제일 오래된 것이 지금부터 70년 전에 김진후(운조) 종손들이 전북 부안에서 발행한 부안보와 1970∼80년대 강경과 이리에서 발행한 파보와 그밖에 1945년경 해방직후에 서울서 발행한 아현보와 1985년 전북 전주에서 발행한 전주보와 1991년 대구에서 발행한 대구보의 경파보에는 일부 가족들이 수록되기는 했으나 빠지고 틀린 부분이 많아서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종가집인 김용태 마지아가 주관을 해서 지난해인 1995년 12월에 김해 김씨 안경공파 가승보의 파보를 간행했다. 그러나 아직도 빠진 가족이 있다.
그리하여 이번 1996년 12월에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金海金氏 安敬公派)의 합동 파보(派譜)를 새로 발행한다고 하니 그동안 이 가족에 누락 되거나 잘못 기록된 내용들이 올바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기록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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