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와 교회지도자들이 순교한 뒤 살아남는 조선 교우들은 교회 재건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하였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성직자를 다시 이 땅에 영입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밀사들을 선발하여 비밀리에 북경 교회와 연락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중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교황청에까지 조선 교회의 실상을 알리는 동시에 자신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도와 주기를 청하였다.
호쾌한 기개 남달라
이를 위해 교우들은 신미년(1811년)에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이 서한은 현재 신유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려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손꼽히고 있다.
신미년의 서한에 들어있는 53명의 순교자들은 박해 후 10년 동안 꾸준히 교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사람들이었고, 가장 존경받는 순교자들이었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또한 그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여주(驪州) 고을에서 살던 전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그가 소론(小論) 가문의 서출이었다고도 한다.
본래 마르티노는 용기와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호쾌한 기개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반면에 난폭하고 성을 잘내는 면이 있었고, 밤에만 걸어 여행하는 기벽(奇癖)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신앙의 진리를 깨우쳐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부터 일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누가 알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신앙을 드러내놓고 고백하였으며,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용감한 성격이 이를 더욱 굳세게 해주었다.
그가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은 것은 1797년경으로, 가까운 친구인 김건순(요사팟)이 서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본 뒤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였다. 당시 이중배(마르티노)의 사촌인 원경도(요한) 또한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그들은 입교한 즉시 가족들을 진리의 문으로 인도하였다.
1800년 부활절때 체포
뿐만 아니라 자주 교우들과 어울리며 신앙을 토론하거나 축일 행사를 가졌고, 그때마다 인근의 교우들이 두려워 하지 않고 한 자리에 모이곤 하였다. 여기에는 양근(楊根) 지역에 살던 조용삼(베드로) 부자도 참여하였다.
1800년 부활절이 되자 마르티노와 동료들은 축일을 지내기 위해 정종호(鄭宗浩)라는 교우집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개를 잡고 술을 장만하여 모두 「알렐루야」와 「부활 삼종경(즉 희락경)」을 부르며 기쁨에 넘친 얼굴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였다. 그런 다음 저녁 때까지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신심과 친교 행사를 치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떼의 포졸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쳤다. 이전부터 그들을 질시하던 밀고자가 이 사실을 낱낱이 관청에 고해 바친 것이다.
놀랄 겨를도 없이 교우들은 줄줄이 오랏줄로 묶여 관장 앞으로 끌려갔다. 이내 문초가 시작되었고,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형벌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은 마르티노의 용기와 격려로 힘을 얻어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요한의 늙은 종이 옥으로 찾아와 요한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자 엄하게 꾸짖어 보냈고,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늙은 부친을 설득하였다. 『아버님, 저는 효의 근본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버님도 저와 같은 교우시니 더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판단해야 합니다.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본래 마르티노는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옥중에서 보여준 그의 의술은 평상시 같아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적과 같은 효험을 나타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옥문이 장마당 같을 정도였고, 모든 이들이 그 효험에 놀라워했다고 전하였다.
여주 관문서 50세에 순교
이렇듯 1년 가까이를 옥에 갇혀 있게 되면서 교우들은 하나 둘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지킬 용기를 잃어 가게 되었다. 게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각 처에서 교우들이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옥에까지 알려졌다.
그러므로 마르티노가 그처럼 열정적으로 격려했지만, 배교하는 신자들이 늘어나 마르티노와 요한,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최창주(마르첼리노) 등 몇몇만이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순교 열정은 굳어져만 갔고, 이를 알게 된 경기 감사는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사형 판결에 대한 재가를 얻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후 마르티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 관문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진 곳에서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가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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