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이란 의미를 지닌 이 길은 초대교회 때부터 예루살렘을 찾던 순례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를 걸으며 묵상하던 길로, 오늘날 성당마다 설치된 십자가의 길은 바로 이 길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길을 찾아 기도하고 있으며 매주 금요일,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십자가의 길이 진행되고 있다.
16일 오후 3시 예루살렘 올드 시티(Old City)의 그리스도인 구역(Christian Quater). 갈색 수도복을 입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 방향을 향했다. 도착한 곳은 아랍인들의 한 초등학교. 빌라도 총독의 관저가 있던 이 자리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곳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라도 언어도 문화도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불과 서너 걸음 정도 폭의 좁은 골목을 가득 채웠다. 거룩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십자가의 길을 나섰지만 그 길에 기다리는 것은 혼란이었다.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아랍상점의 노랫소리, 음식 만드는 냄새, 지나가는 관광객들, 사진 찍는 사람들, 호객하는 사람들. 한편에는 소총을 쥐고 있는 군인들이 매서운 눈으로 이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인파와 혼란 속에 각 처를 바라볼 수조차 없었고, 스피커에서 들리는 기도소리도 듣기 힘들었다. 성당에서 드리던 경건한 십자가의 길을 기억하는 몇몇 이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길은 2000년 전에도 결코 경건하고 엄숙한 길이 아니었다. 지금은 예루살렘 성의 범위가 넓어져 성 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원래 이 길은 성벽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던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갔고 또 그중엔 예수를 모독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섬뜩한 창과 칼을 찬 로마 병사들이 골고타 언덕에 이르기까지 채찍질을 하며 따라나섰다.
“Ora pro nobis peccatoribus, nunc, et in hora mortis nostrae(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한 처, 한 처를 지날 때마다 바치는 순례자들의 기도소리는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이 혼란함에도 거룩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순례자들의 마음은 우리 죄인을 위해 대신 처형을 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향해 있었다. 순례자들의 기도는 이 길을 함께 걸었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갔다.
1처에서 9처까지의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주님무덤성당.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고 묻히기까지 10~14처는 바로 한 성당에 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 아르메니안정교회가 나눠 관리하고 있다. 원래 언덕이 있던 이 자리는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가 유다계 그리스도 신자들을 해체시키고자 언덕을 깎아 로마 신전을 세운 자리다. 그리고 중세 유럽의 많은 지도가 이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표현해왔다.
주님무덤성당에 들어선 순례자들은 언덕 대신 겨우 한 사람이 간신히 오를 수 있는 비좁은 원형계단을 올라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자리와 성시(聖屍)가 내려졌다는 돌을 차례로 순례하며 경배했다. 길게 선 줄 끝에 찾은 십자가의 길의 마지막은 바로 빈 무덤이다. 순례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랬듯 빈 무덤을 확인한다. 이 무덤에 더 이상 예수의 시신은 없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6-17)
세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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