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의 사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에너지는 규칙 생활이었습니다. 규칙을 잘 지켜야 건강하고, 사제로서의 생활도 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올해로 사제서품 60주년을 맞는 백민관 신부의 삶은 이렇듯, “규칙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 산다(Regulae Vivit, Deo Vivit)”는 격언을 보는 듯하다.
신학교 교육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세가지 목표가 거론된다. 소위 ‘3S’라 부르는 ‘학문(Scientia)’, ‘건강(Sanitas)’, ‘성덕(Sanctitas)’의 덕목이다. 사제 양성 기간 중에 이뤄지는 모든 다양한 교육은 결국 이 세 가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3S는 사제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갖춰야 할 꼭 필요한 내용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성덕은 막연하기도 하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것으로 꼽힌다.
백 신부는 “다행스러운 것은 전통적으로 신학교마다 내려오는 생활 규칙들을 따르다보면 자연스럽게 성덕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제자 신학생 후배 사제들에 대한 당부는 늘 “규칙을 잘 지키라”는 것이 첫 순위다.
■ ‘미사 복사’의 꿈이 ‘사제’의 꿈으로
1927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백 신부의 사제 생활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시작됐다. 부산에 마련된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피란 시절이었다. 같은 평양교구 출신이던 고(故) 지학순 주교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깨어 기구(기도)하라’가 서품 성구였다.
“덕원신학교를 다니다 공산군에 의해 폐쇄되고 그 후 부모·형제들과 이별을 하고 혈혈단신으로 남한으로 내려와 신학교를 다녔지요. 전쟁이 터지면서 험난한 피란길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서울에서 배를 타고 수원으로, 그리고 대구로 부산으로 또 제주로. 그러한 피란의 여정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사제로 만드시기 위해 인도하신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 신부가 지녔던 사제의 꿈은 어린시절 복사를 서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 ‘미사 복사’는 가장 하고 싶었던 꿈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촛대잡이’로 만족해야 했고, 중학교에 입학해서야 미사 복사의 원의를 이뤘다. 그리고 ‘라틴어’, ‘영어’, ‘오르간’, ‘노래’ 등 모든 것에 능통방통했던 주임신부의 모습은 ‘사제’로 살아가고픈 마음을 굳히게 했다. 백 신부는 “사제로서의 길은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하느님께서 이끄신 듯하다”고 회고한다.
서품식 날 백 신부는 두 가지 소원을 청했다. 하나는 명동성당처럼 높은 종탑이 있는 성당에서 살았으면 하는 것, 둘째는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가회동본당 보좌신부 시절, 인근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 성당을 지을 수 있었던 백 신부는 성당 건축을 하던 와중에 성신중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두 번째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2년의 교사생활 후 벨기에 루뱅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백 신부는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을 거쳐 1963년 대신학교 교수로 소임을 받게 된다. 그 후 1983~85년 돈암동본당에서 2년 동안 주임신부로 재직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50년 세월을 신학교에서 보냈다. 자칭 ‘신학교 귀신’이라는 백 신부의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백 신부는 신학교 부임 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과 함께 각 지역 교회에 불어온 쇄신의 바람 속에 ‘기도문’, ‘미사통상문’ 등의 개정 작업 및 「공동번역 성경」 출판에 참여하며 한국교회 신학 연구 발전에 중추적인 몫을 담당했다.
제9대(1973~76년)와 제14대(1985~88년), 두 차례에 걸쳐 신학대학 학장을 지냈던 백 신부는 ‘외유내강’의 성격 속에 언제나 간단명료하게 ‘답’을 내려주는 카리스마를 보였다. 그런 이유로 동료 교수 신부들에게 ‘신학교의 어머니’, ‘신학교 운영의 백과사전’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 1944년 중학교 5학년 때의 백민관 신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성소의 꿈을 키웠다.
▲ 사제품을 받은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백민관 신부(오른쪽 두번째). 사진 왼쪽 첫 번째가 노기남 주교, 그 옆은 후에 주교가 된 지학순 신부다.
■ 사전 저술은 가장 보람된 일
백 신부는 학문 연구·신학생 양성의 일과 함께 ‘동(冬)키하(夏)테(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테니스)’의 별명을 지닐 만큼 정기적인 스키, 테니스 등 운동으로 체력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요즘도 겨울이 되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반드시 스키장을 찾는다. 이같은 평 소 생활과 함께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학문 연구에서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후배들은 “학문·건강·성덕의 ‘3S’를 몸소 실천하는 삶”이라고 입을 모은다.
2007년에 펴낸 「백과사전 -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은 백 신부가 60년 사제 생활을 돌아볼 때 가장 보람된 일로 꼽는 작업이다. 팔순의 나이에 세상에 소개한 가톨릭 종교 대사전이었다. 개인적으로 15년 여를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그러나 백 신부에게 한쪽 눈을 실명하게 만든 시련이기도 했다.
“사전 발간은 하느님과 교회에 진 빚을 갚았다는 홀가분함을 남겨주었다”는 백 신부는 “시력에 변화가 생긴 것은 하느님께서 이제 휴식의 시간을 가지라는 뜻으로 주신 결과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는 세간의 평가처럼 책을 가까이 하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던 경험을 돌이킬 때, 이제 ‘시력 때문에 글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답답함으로 다가올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백 신부는 그에 대해서도 “아쉬움보다는 그저 시원스런 마음이다”고 특유의 ‘쿨(cool)’한 대답을 남겼다.
■ 한없는 사제 생활 … 이산가족 된 것 가슴 아파
2004년 일선에서 은퇴한 후 지난해까지도 라틴어 강의를 했으나, 올해는 그것마저 내려놨다. 백 신부는 그간의 사제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신부가 될 때”였다고 떠올렸다.
“부모·형제들과 떨어져 이산가족이 된 것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사제로서 살아온 60년의 생활은 부족함이 없었다”고 들려준 백 신부는 “대체로 한(恨) 없는 사제로서의 삶이었다”면서 “성령이 사제들에게 작동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전달하고 사제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내가 성령의 인도로 일한다’는 것이라고 볼 때 그런 면에서 나름 성령의 인도대로 살았던 것 같다”고 했다.
「백과사전-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출판으로 2009년 12월 가톨릭신문이 제정한 ‘가톨릭학술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던 백 신부는 당시 수상 소감을 통해 “하느님의 특별한 가호로 흰머리가 생겼다”면서 “성경 말씀에 ‘흰머리는 노고의 상징’이라고 나오는데, 이 흰머리가 과거를 빛내주는 결과라고 여겨져 볼 때마다 자부심을 갖게 된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면서 하얗게 서리가 내린 백 신부의 머리에 눈길이 머물렀다. 백 신부의 말처럼 60년 사제 생활의 수고를 드러내주는 하느님의 손길처럼 여겨졌다.
▲ 1988년 백민관 신부의 회갑 축하연 모습. 오른쪽부터 김옥균 주교, 백민관 신부, 김수환 추기경, 강우일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