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으로 이어지는 손 대화
벌써 20년이다. 남들은 대학진학을 꿈꾸며 공부가 한창인 고등학교 3학년 때, 김재현(안드레아ㆍ39)씨는 수화를 시작했다. 목적이나 이유가 없는 배움이었다. 그저 호기심 삼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배움이 김씨의 시각을 변화시켰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보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철산성당을 다녔지만 ‘수화미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공장지대가 근처에 있었던 성당에는 직장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청각장애인들이 많았다. 본당에서는 이들을 위해 성당 한편에 청각장애인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그들 앞에서 봉사자가 전례와 복음을 통역했던 것이다. 미사 때마다 김씨의 눈길은 수화봉사자의 손짓으로 향했다.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어느 날 청각장애인이 찾아와 “청각장애인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청각장애인에게 “아니요, 비장애인입니다”라고 답했다. 물론 수화로 표현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김씨는 철산본당 수화봉사모임 ‘샘물회’를 알게 됐고, 봉사자로서 활동하게 됐다. 1992년의 일이다. 그는 다른 수화봉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전례와 복음, 강론을 통역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청각장애인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고민도 듣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점차 비장애인들의 평범한 일상이 청각장애인들에게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 봉사를 시작했을 때였어요. 청각장애인이 가지고 있던 가습기가 고장이 났는데, 대화가 안 되니까 고칠 수 없어서 방치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제가 같이 센터에 가서 통역을 해서 고쳤어요. 수화를 한지 얼마 안 돼서 어설펐지만 그렇게라도 도울 수 있었던 것에 보람과 뿌듯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손’을 통해 나누는 대화가 그는 좋았다. 비장애인보다도 청각장애인들과 하는 대화가 더 즐거웠다. 수화를 할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희열이 느껴질 뿐이었다.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국어와 영어 등 입으로 하는 언어와는 다른 수화에 매료됐다. 개인적으로 특강도 듣고, 공부를 했다. 1998년에는 ‘손사랑’이라는 수화 동호회도 만들어 자신이 맛본 수화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다. 점차 청각장애인 사이에서도 ‘김재현’이라는 이름이 알려져 그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요즘은 종교와 지역에 상관없이 청각장애인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드리는 봉사도 하고 있어요. 사기, 집, 가정, 결혼문제 등등 수화통역을 하고 있죠. 저는 그런 통역을 해드리면서 보람을 느끼는 동시에 스스로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느껴요.”
▲ 미사 통역 봉사를 하고 있는 김재현씨.
■ 열정은 곧 근면
수화에 대한 열정은 그를 지금까지 활동하게 한 원동력이다. LG MC사업본부 해외교육 담당 과장으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새벽에 청각장애인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집과 거리가 먼 경기도 남양주, 광주까지 다녀오는 그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매주 성당에 나가 미사 통역도 하고, 다른 청각장애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
수화통역 봉사를 시작한 이후 김씨는 한 번도 이 일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수화를 통해 청각장애인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20년 동안 철산본당 ‘샘물회’를 떠나지 않는 이유다.
“저는 수화통역을 시작한 것도, 열심히 하도록 이끄신 건 주님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그래서 항상 주님께 기도해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수화통역을 평생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요.”
봉사를 하면서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것은 청각장애인들에게 전교한 일이다. 수화통역봉사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목표도 종교와 맞닿아 있다.
“청각장애인을 성당으로 인도하고 영세까지 받게 하는 일은 비장애인의 10배 이상 힘든 일이에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청각장애인들에게도 신앙교육의 기회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냉담하시는 분들을 찾아뵙고 다시 성당으로 인도하고 싶어요.”
현재 ‘샘물회’ 통역봉사자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은 20년이 지났지만 마음만은 수화를 시작한 고3 때와 같다. 그를 필요로 하는 청각장애인이 있다면 언제라도 당장 달려 나간다. 그에게 청각장애인은 친구고 동반자다.
“전 평생 청각장애인과 더불어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요. 이게 제 인생의 목표이자 꿈이에요.”
▲ 샘물회 수화학교 수료식 기념촬영. 김재현씨는 세 번째줄 맨 왼쪽.
▲ 샘물회 수화교실에서의 김재현씨.(오른쪽에서 두번째)
◎ 칠극 ‘책태(策怠)’
칠극 마지막 제7편 ‘책태’는 부지런함으로 ‘해타(懈惰)’ 즉 게으름을 극복하라고 이른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명령, 선과 덕, 도를 향해 정진하고 수양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게으름의 확장이다.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수고로워야 하며, 사악한 감정과 맞섰을 때 용감함과 굳셈으로 극복해야한다. 세상의 즐거움, 편안함을 멀리하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근덕(勤德)’은 하느님의 은혜, 보답, 영생을 가져오며, ‘해타’는 하느님의 분노, 재앙, 벌을 가져온다. 해타가 현세에서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근덕은 내세에서의 행복을 지향하는 차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