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한 이로는 임군집(요셉)이 있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교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1846년에 체포하여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에는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것이다.
정약종이 인도
한국의 순교자들 가운데서 이와 같은 경우는 여럿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제 말하고자 하는 조용삼(趙龍三, 베드로) 또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최근까지 베드로의 이름이 「용삼」이라는 것이 알려져 왔지만, 그 한자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황사영 또한 「백서」(帛書)에서 그 이름을 단지 조백다록(趙伯多祿)으로만 표기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발견된 조선 신자들의 신미년(1811년) 서한을 통해 비로소 그 한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자들은 그가 순교자임을 굳게 믿었으므로 초기의 순교자 반열에 그를 올려놓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경기도 양근 땅의 한양 조씨(漢陽趙氏) 집안에서 태어난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병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이러니 서른이 되도록 혼인할 규수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을에 살면서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만은 그의 열심을 칭찬했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도리를 그에게 가르치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부친인 조제동과 함께 신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세례를 받고 입교하기도 전에 여주와 그 이웃인 양근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4월과 5월이었다.
‘용기’ 하늘 찌를듯
당시에 이미 천주교 신자로 이름이 있었던 정약종은 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를 하였는데, 그에 앞서 베드로는 부친을 따라 여주의 이중배(마르티노)에게 가서 정종호ㆍ원경도 등과 함께 부활 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아직 예비 신자에 불과했지만,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 신앙을 다짐하는 부친에게 『아무도 자기 결심과 자기 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약하고 불쌍한 제가 어떻게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은, 바로 신앙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의 겸손에서 나온 말임이 얼마 안되어 분명해지게 되었다. 관장 앞에 이르러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자, 그는 부친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그른 길로 간다고 해서 자식도 그른 길로 간다면 그것은 효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뿐더러 그분들 위에 천지만물의 대부모이시며 공통된 아버지가 계시니, 제게 생명을 주신 그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말에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고, 이내 베드로의 무릎은 다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앙을 버리지 않자 관장은 마지막 수단으로 그의 부친을 불러다 아들에게 배교하도록 권유하라고 하면서 혹독하게 매질을 하였다. 결국 이것이 베드로에게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련이었으니,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는 굴복하여 부친과 자신을 모두 석방해 달라고 청하였다.
옥에서 석방되어 나오던 베드로는 다시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마르티노는 그의 나약함을 책망하면서 통회를 권고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이 맹목적인 효성에 진 것일 뿐 신앙을 잃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베드로는 이튿날 아침 다시 관장에게 나아가 이전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관장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오랫동안 가두어놓고 가혹한 시련과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으니, 그의 겸손한 통회는 몇 달 동안이나 흔들리지 않았다.
시신위에 광채보여
그러던 중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각처에서 교우들이 체포되고 있던 1801년 2월 14일(양력 3월 7일), 베드로는 마지막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늘에는 두 주님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죽은 뒤 시체 위에는 이상한 광채가 보였고, 이를 본 많은 교우들이 그의 순교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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