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화」에서 벗어나「영성공동체」로 거듭나야”
부산을 포함한 경남 울산, 양산지역의 32만여 신자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최고 목자인 부산교구장 이갑수(가브리엘ㆍ72)주교. 그가 지난달 24일로 주교성성 25주년을 맞았다. 교구 평협은 이 주교의 영명축일(29일)기념을 겸해서 오는 23일 남천성당에서 주교서품 은경축 축하행사를 갖는다.
『세월이 참 빨라요. 벌써 25년이 흐른걸 보면…. 한 교구에서 이렇게 평생을 별 탈 없이 지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6일 오전 10시. 부산 가톨릭센터내 교구장 집무실에서 만난 이 주교는 감회가 새로운 듯 지긋한 눈빛으로 짧게 소감을 밝혔다. 은은한 모란빛 하얀 주교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일흔을 넘긴 나이답지 않게 아직도 동안(童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고희를 넘긴 연세에도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혹시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라도 있으신 지요.
▶뭐 특별한 비결이라기보다 규칙적인 생활이 건강을 유지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죠.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7시에 미사를 드리고 9시부터 정오까지 사무실 집무를 보는 것이 공식적인 하루 일과입니다.
-주교님께서 낚시를 즐기신다는 얘기는 이미 유명합니다. 요즘도 자주 낚시를 가십니까.
▶매주 목요일이 내가 쉬는 날인데 이날 비가 오거나 겨울철이 아니면 낚시를 가죠. 어제도 김해 쪽에 갔다 왔어요. 나는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배를 타지 못해요. 그래서 바다에는 못 나가고 민물낚시를 주로 하지요. 잡은 고기는 가져오기도 하고 깨끗한 것은 그 자리에서 잡아먹기도 해요.
-독서도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교회서적 말고 달리 좋아하시는 책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잠자리에 들기전에 항상 책을 즐겨 읽는데 미국이 웨스턴(서부극)소설을 좋아합니다. 내용은 거의가 같습니다. 선한 사람은 이기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 주된 줄거리인데 구조도 단순해「심심풀이」로 읽기에는 적당해요. (이 주교는 영어 단어를 잊지 않기 위해 웨스턴 소설을 모두 영어 원어로 된 책들을 읽는다고 했다.)
-신학교에는 어떻게 가게 되셨는지요.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박동준(마지아)신부님과 아버지, 그밖에 주위 분들이 많이 권유했지요. 초등학생이 뭘 알겠어요. 당시엔 너무 못살아서 빵을 먹고 싶어 신학교에 가기도 하고 했지만 난 주위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신학교에 가서야 깨닫게 됐지요.
1924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이 주교는 영천국민학교와 소신학교인 서울 동성상고를 거쳐 44년 가톨릭대학에 입학, 50년 10월 28일 사제로 서품됐다. 부산 범일본당 보좌신부를 거쳐 52년부터 61년까지 미국에 유학,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해 경북대 효성여대에서 강의했으며 65년부터 대구 선목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71년8월 주교로 승품되면서 부산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됐다.
주교품을 받으시고 4년 뒤부터 줄곧 부산교구장을 맡으셨습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부산교구도 많이 발전했고, 많이 변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주교품을 받을 당시만 해도 부산교구는 36개 본당에 신자수는 7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동안 신자는 32만 명을 넘어섰고 본당도 78개로, 사제수도 1백88명으로 늘어났어요. 인적 물적으로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고 봐요.
부산은 국내 제2의 도시이고 항구도시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특별히 이런 지역사정을 염두에 두시고 관심을 쏟으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요.
▶저는 교구에서 주교와 신부님들, 그리고 신부님들 사이의 일치와 융화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엔 이런 문제로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부산은 특히 항구도시여서 해양사목에 오랜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해양사목이라 하면 선원 가족들과 외국인 선원들을 위한 사목 두 분야로 볼 수 있습니다. 외국 선원들은 잠시 머물렀다 가기 때문에 아무래도 국내 선원 가족들에 더 관심이 집중되지요. 교구내 본당 가운데 선원 가족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정문제 등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초량성당 근처에 해양 선원들을 위한 휴식공간을 마련해서 이용하도록 했지요.
전국에서 최초로 해양 사목부를 설치했고, 91년엔 교구차원의「해양주일 행사」를 처음 실시했습니다. 올해 시(市)로부터「해양의 날」제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90년대 들면서 우리사회가 급격히 변화되고 교회도 그 소용돌이에서 예외일 수 있습니다. 시대변화에 적응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연구되고 시도되고 있지요. 2천년대 복음화를 위한 소공동체 운동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주교님께선 지금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조망하고 계신지요. 아울러 교회가 처한 현실과 문제점,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풍조가 감각 위주로 흐르고 있습니다. 「감각(sense)문화시대」라고 할 수 있지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설득으로 통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교회도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즉 신앙도 이제 이론적으로 가르쳐서 될 게 아닙니다. 바로 신앙인들이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복음도 가능하다면 감각적인 방법을 이용해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디오-비디오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 신자들 보십시오. 주일날 미사참례 하는 것 빼고는 세속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요. 신자들이 이 사회의 가치기준에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세속을 성령의 힘으로 성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임무인데 현 세상은 세속의 힘이 너무 강해 교회를 속화시키고 있어요. 신앙의 힘이 스며들어서 참으로 기쁘고 복음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신앙인들이 보여줄 때 비신자들에게 우리 신앙이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어필할 수 있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88년 올림픽과 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가 가장 정점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예비자도 줄고 교우들도 냉담하고 사제 지망자도 줄어들어요. 이런 상태로는 구라파 교회의 위기가 한국에도 금세 닥칠 거예요. 따라서 교회의 고유한 영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영성을 집중시켜 교회가 영성 공동체로 거듭 나야만 합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직자들이 평신도들 보다 덜 열심할 때 이것은「위험신호」입니다. 한때 그러했고, 지금도 그런 조짐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속의 조류, 거센 물결에 함께 대처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모두 떠내려가고 말 것입니다.
-사회학자셔서 그런지 주교님의 현실분석이 매우 날카롭고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주교님께선 한국 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오늘날 매스 미디어의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고 하겠습니다. 언론의 사명이랄까요, 특히 교회 언론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십시오.
▶언론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언론 종사자들은 특출한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한데 요즘 언론들은 특종에 집착한 나머지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고 언론의 본 사명을 망각하는 수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교회 언론은 숨어서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많이 소개하고 사회의 따뜻한 면, 긍정적인 부분들을 많이 드러내야 할 겁니다. 당장은 재미없고 인기를 못 끌더라도 좋고 선한 것을 자꾸 접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이런 차원에서 교회언론의 소명도 막중하다고 봅니다.
-내년에 부산교구가 설정 40주년을 맞습니다. 준비하고 계신 일이 있다면. 아울러 주교님께서 구상하고 계시는 2천년대 부산교구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40주년 행사를 알차게 치루기 위해 곧 행사 위원회를 조직해서 추진할 생각입니다. 부족한 신앙적 열의를 북돋우는데 역점을 둘 것입니다. 2천년대 교구 모습은 글쎄요. 좀 더 신앙인답게 살 수 있도록 독려하고 가르치는 교회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는 것이겠죠. 교회 발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전 본당을 전산망으로 연결하는 정보화 작업을 추진 중입니다. 교회도 다양한 언론매체를 소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라디오 방송은 현 상황에서도 상당히 이용가치가 높을 것 같아서 부산교구도 라디오 방송국 설립을 성사시킬 생각입니다.
-부산교구장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법상 교구장 은퇴시기가 75세지요. 오는 99년이 연한인데 보좌주교 문제도 고려해야 되고…. 젊은 분들 중에 몇 사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임기 후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조용히 신앙생활을 다지며 지낼 생각입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교서품 25주년을 신문사 모든 직원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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