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엄한 감시와 박해 아래에서 쉽게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과 친지 외에는 모두가 박해자들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은 언제나 전교 대상자를 찾아냈고, 훗날 체포되어 함께 투옥되었을 때에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것은 박해가 여러 차례 계속된 다음의 일이었다. 초기의 신자들은, 특히 가문 있는 자제들의 경우는 우선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탄압을 받아야만 했으므로 여간해서는 그들에게 전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친구들로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도 여주 출신의 이희영(李喜英ㆍ루가)도 바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가운데서 교리를 알게 되고, 이를 진정한 신앙으로 받아들인 경우였다. 그는 일찍이 여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지만, 이를 알지 못하다가 41세 되던 1797년 가을에 김건순(金建淳ㆍ요사팟)으로부터 교리를 듣게 되었다. 본래 그들은 7촌 인척간인 데다가 이희영의 가족이 오랫동안 김건순의 집에서 부쳐살고 있었는데, 이 사실에서 볼 때 이희영의 집안은 가난하거나 불운했지만 김건순과 마찬가지로 노론(老論) 계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에 앞서 김건순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오랫동안 천주교 교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런 다음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즉시 고향인 여주로 돌아가 친구들을 권화하여 입교시키게 되었다. 당시 그에게서 교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희영을 비롯하여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 순교자 이중배(마르티노)와 원경도(요한)가 있었다.
또 강이천 같은 경우에는 함께 교리를 듣고 입교할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입교를 거부했다고 전한다.
본래 이희영의 동료들은 김건순ㆍ강이천의 주도 아래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은 원한을 씻기 위해 바다의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력을 기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7년에 이 계획이 탄로남으로써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강이천은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물론 주문모 신부는 이러한 계획을 듣고는 옳지 않다고 여겨 그것을 버리고 대신 참된 진리를 믿으라고 권고하였다.
이희영은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한 뒤, 즉시 서울로 올라가 주 신부를 찾아뵙고는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다음 세속의 친구들을 멀리하고, 「해도병마」의 계획 같은 것은 마음에서 완전히 없애 버린 다음 정광수(바르나바),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산델)과 같은 교우들과 왕래하면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갔다. 뿐만 아니라 신앙 생활을 더 열심히 하려는 목적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주하여 살았다.
본래 그는 그림에 재질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고향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있었다. 특히 여러 그림 중에서도 개와 같은 풍속화를 잘 그렸는데, 지금도 그 작품 가운데 일부가 전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재질을 바탕으로 그는 입교하자마자 성화(聖畵), 상본(像本) 등 종교화를 자주 그려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
서울로 이주한 뒤 이희영의 열심이 날로 더해 가는 것을 본 주문모 신부는 1799년 그에게 「루가」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제 그의 마음은 나는 것처럼 기쁨에 넘쳤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는 언제나 신앙의 즐거움으로 인한 희망이 가득하게 되었고, 열심한 신자로서 이름이 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포졸들은 곧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으며, 이내 그의 집으로 몰려가 체포하였다.
먼저 포도청에 갇힌 이희영은 30여 일 동안 갖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거나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 김건순 등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면서 그 또한 의금부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건순은 주문모 신부를 만난 적이 없다고까지 하면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부인하려고 하였으니, 그것은 악마의 유혹에 대한 굴복이었다. 반면에 이희영은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고 형벌을 참아 받은 뒤 1801년 3월29일(양력 5월11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 어느 기록에서는 형벌을 받는 사이에 점차 마음이 약해져 배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또 다른 기록에서는 그의 신앙 고백과 순교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과연 그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천상의 빛을 얻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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