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의 보금자리인 꽃동네(회장=오웅진 신부)가 9월 12일자로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만 20세로 의젓한 성인(成人)이 된 꽃동네의 지난 성장기는 사랑과 은총, 축복과 기적의 시간이었다.
특히 20주년을 맞은 올해는 꽃동네 회장 오웅진 신부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을 수상했고, 꽃동네의 숙원사업이던 ‘사랑의 연수원’이 10월10일자로 준공하고,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에 입회해 신학과정을 마친 첫 사제를 배출하는 등 겹경사를 맞고 있다.
본보는 이 땅에 사랑과 나눔, 봉사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 꽃동네의 설립 20주년을 함께 기뻐하며 지난 20년의 발자취를 정리해 보았다.
『매달 1천원의 회비로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을 돕는 꽃동네 후원 회원들을 한 분 더 인도해 주십시요』
오웅진 신부의 묘비명에 담겨질 말이다.
이미 자신의 사체와 안구를 기증할 것을 서약한 오웅진 신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고동치던 자신의 심장 하나만큼은 영원히 꽃동네 가족들과 함께 하고파 꽃동네 묘지에 묻히길 간절히 원했다.
오웅진 신부는 『꽃동네는 결코 감상이 아니다』고 말한다. 지난 20년간 담배 한갑, 소주 1병 당신의 돈으로 사본 적이 없다고 한다. 또 따뜻한 밥을 식기 전에 제대로 먹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오웅진 신부는 꽃동네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잠들어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오 신부는 기도로써 꽃동네 일과를 시작한다.
그의 기도 지향은 모두 5가지.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조차 없는 이들」과「꽃동네 가족」「꽃동네 형제회, 자매회 수사 수녀들」「꽃동네 후원 회원들과 그 가족들」「온 국민과 전 인류」를 위해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게 해 달라는 봉헌의 기도이다.
오 신부는『꽃동네는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시기에 꽃동네 운영에 관한 자신의 계획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다만『낮이고 밤이고 하느님께서 하라시는데로 뛰어들 준비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그대로 된다는 확신만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故) 최귀동 할아버지를 회상하며『그분은 말없이 복음대로 산 걸인의 성자』라고 말한 오웅진 신부는『수식어가 없는 진실 그대로의 삶을 산 귀동이 할아버지의 삶은 오늘날 모든이가 배워야 할 아름다운 영성』이라고 피력했다.
1년에 20만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꽃동네를 찾아와 나눔과 봉사, 사랑의 삶을 배워 나가고 있다는 오웅진 신부는 사랑의 연수원을 통해 사랑의 결핍으로 생겨나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꽃동네의 지난 20년간 은총의 시기는 하느님의 업적이었다』고 강조한 오웅진 신부는『베푸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꽃동네는 오웅진 신부가 청주교구 무극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할 당시 1976년 9월12일, 걸인인 최귀동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면서 탄생하게 됐다.
충북 음성 무극천 다리 밑에서 병든 몸을 이끌고 40여 년 동안 남의 밥을 얻어다가 자기보다 못한 걸인들을 보살피며 살던 최귀동 할아버지를 우연히 목격한 오웅진 신부는 바로「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일생의 신념을 최귀동 할아버지와 함께 실현하기 시작했다.
1천 3백원 몽땅 털어 집 지어
오 신부는 그날 바로 갖고 있던 돈 1천3백원을 몽땅 털어 시멘트를 사 블록을 찍어 무극성당 뒤 용담산 기슭에 「사랑의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 집이 오늘날 꽃동네의 모태가 됐다.
그래서 오웅진 신부는 꽃동네 설립일을 최귀동 할아버지와의 운명적 만남의 날인 1976년 9월12일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20년전 방 다섯 칸, 부엌 다섯 칸에 18명의 식구로 시작한 꽃동네는 20년이 지난 지금 3천5백여 명으로 식구가 불어났고, 시설도「음성」「가평」꽃동네 외에 제3의 꽃동네를 설립 중에 있다.
1982년 5월25일 현재 음성 꽃동네가 위치한 충북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산 1-45지 대지 9천8백7평을 매입, 이전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꽃동네에서 생을 마감한 행려자들의 수가 2천3백여 명에 달하며, 건강을 회복, 자원해 재활의 삶을 살기 위해 사회로 복귀한 가족들이 4천여 명이 된다.
꽃동네는 20년 동안 1만여 명의 의지할 곳조차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춰줬다.
꽃동네의 지난 20년간 발자취가 사랑과 은총, 축복과 기적의 역사였다는 것은 증거는 수없이 많다.
먼저 꽃동네 후원 회원들이 72만여 명을 헤아린다. 이들이 매달 1천원 이상씩 성금한 후원금으로 꽃동네가 운영되고 있다. 이들 후원 회원들 중에는 33년 간 휴지를 모아 팔은 돈 9백83만원을 몽땅 기탁하는 익명의 노(老)부부 같은 고마운 은인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두 번째 기적은 봉사자들이다. 현재 3백여 명의 남녀 수도자들과 2백여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꽃동네 가족들을 돌보고 있다. 하지만 기업인, 공무원, 군인, 학생, 재소자 할 것 없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매일 8~9백여 명 꽃동네를 찾아와 손을 빌려주고 있다.
특히 꽃동네를 찾아오는 봉사자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노동력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꽃동네에서「사랑을 베푸는 행복한 삶」을 배워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 기적은 꽃동네 가족들이다. 남에게 달랄 줄만 알고 베풀 줄 모르던 이들이 자기보다 못한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나눠주고 있다.
팔 다리가 없는 가족에게 팔과 다리가 되어주고 앞 못 보는 이에게 눈이 되어 준다. 그래서 꽃동네에는 울타리가 없고 경비원이 없다. 가족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도와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장기기증 등 꽃동네 가족도 나눔 실천
또한 꽃동네 가족 중 1천3백여 명이 죽으면서 자신의 안구와 몸을 기증해 빛을 잃은 2천여 명이 광명을 찾았다.
이처럼 상상할 수 없는 기적들이 매일 꽃동네에서는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꽃동네는 설립 20주년을 맞아 이제 전 국민이 꽃동네를 찾아와「나눔과 봉사의 삶」을 배우는 사랑의 교육장으로 변신하고 있다.
사랑의 결핍으로 생겨나는 수많은 사회악들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 꽃동네가「사랑의 연수원」을 지어오는 10월10일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성인(成人)이 된 꽃동네는 이제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만이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부족한 사랑을 채워주는「옹달샘」으로 거듭 나고 있다.
오웅진 신부는 앞으로 꽃동네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꽃동네는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국가, 행복한 인류』를 지향해 나갈 것이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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