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金範禹ㆍ토마스). 우리는 대부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또 지금의 명동 대성당 부근에 있던 명례방(明禮坊) 마을에 그의 집이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유박해 때 순교한 그의 아우 김이우(金履禹ㆍ바르나바)와 김현우(金顯禹ㆍ마태오)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인 김범우의 행적이 너무나 초기 교회사에 뚜렷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1784년 겨울부터 김범우의 집에서는 초기의 신자들이 함께 집회를 가지면서 교리를 연구하였고, 때로는 서적에서 배운 대로 교회 예절을 거행하였다.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요한)의 집이 집회장소로 비좁게 되자, 역관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던 김범우가 자신의 집 한켠을 신자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수표교에 있던 최초의 신앙 공동체는 명례방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당시 범우의 넷째 남동생인 김이우(바르나바)는 열 살이 좀 넘었고, 다섯째 아우인 김현우(마태오)는 10살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이우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장형 범우의 가르침을 따라 즉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으며, 또 자신이 배운 신앙을 아우인 현우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이듬해 봄, 명례방 사건으로 장형 범우가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집안을 이끌어왔고, 어린 이우와 현우를 보살펴주던 터였으므로 이제 이들 형제는 어려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청년으로 성장하면서는 교회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또 가성직제도가 시행되자 이승훈(베드로)을 찾아가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한때 그들은 다른 형제들을 입교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자 분가해 살면서 자신과 같은 중인층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1795년 초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우는 현우를 데리고 정동에 있던 최인길(마티아)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만나보았다.
그들 형제는 이곳에서 주 신부의 강론을 듣고 신앙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교회 서적을 빌려다 이웃 신자들과 함께 밤을 새워 가면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발각되어 신부가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게 되자, 이우는 자신의 집에 신부를 잠시 모시고 있다가 좀 더 안전한 피신처를 구해 신부를 그리로 모셨다.
그 후 주 신부는 교리 연구과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였다. 이때 그들 형제는 즉시 여기에 가입하였으며, 자신들의 집을 집회 장소로 내어놓았다. 이로써 그 집은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중의 하나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7일마다 이곳에 모여 집회를 갖던 신자들은 최필제(베드로), 손경윤, 현계흠, 이용겸, 손준열 등이었는데, 1800년 6월에는 주 신부가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모두에게 성사를 주었다. 미사 전에 이우는 십자고상을 벽에 걸고, 촛불을 준비해 두었으며, 휘장과 방석 등을 갖추어 둠으로써 전례가 잘 이루어지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 집회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박해자들의 감시가 더욱 엄중해졌기 때문이다. 이우는 박해 소식을 듣자마자 교회 서적과 성물 등을 감추고, 교우들과 비밀리에 연락하면서 박해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박해는 점점 거세어져서 더 많은 교우들이 곳곳에서 체포되거나 순교하였고, 끝내는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 신부가 순교한 뒤에도 그들 형제는 당분간 박해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지만, 5월 말에는 마침내 포졸들의 습격을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포졸들은 특히 그들 형제가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드리거나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이용했다고 하여 심한 형벌과 문초를 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들은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다.
문초와 형벌은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은 다시 문초를 하기 위해 형인 이우를 데리러 갔다가 그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매질로 인해 순교한 뒤였기 때문이다.
아우인 현우의 마음도 굳기가 철석같았다. 오히려 그의 신앙은 형의 순교로 인해 더 굳어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였고,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아 1801년7월 2일(음력5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한편 교우들은 한결같이 『현우가 체포되었을 때,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 그를 인도하면서 옥으로 가는 길을 가르켰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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