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성인전을 보면, 그들의 삶과 순교가 한국의 초기 순교자들과 유사란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성녀 마르타(혹은 마르티아)는 활동적이면서도 관상생활을 중시한 동정 순교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 가운데서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점혜(아가다)와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을 바로 한국의 마르타 성녀라고 할 수 있다.
문영인 비비안나는 중인 계층의 집안에서 다섯 딸 중의 셋째로 태어나 일곱 살 때인 1783년에 궁녀로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그의 부친은 궁녀를 선발하는 관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이가 많은 언니들은 다른 곳에 가 있도록 했으나, 비비안나는 아직 어렸으므로 선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냥 집에 있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관리들이 그녀의 총명함과 용모를 보고는 서슴없이 궁녀로 선발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성장하게 된 비비안나는 관례대로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열다섯 되던 해에 머리를 올렸다. 또 글씨에 재주가 있었으므로 궁에서 문서 쓰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 무렵 모친과 언니들은 이미 천주교를 봉행하고 있었는데, 비비안나가 궁에서 나와 잠깐씩 집에 들릴 때면 함께 천주교를 봉행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궁에 매어 있는 데다가 각종 미신 행사에 참여해야만 하였으므로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훗날 궁에서 나오게 되면 그때나 천주교를 봉행하겠다』고 다짐하곤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생각보다 빨리 비비안나의 입교를 결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주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1797년 갑자기 중한 병이 들어 궁궐의 갖가지 약으로도 효험을 볼 수 없게 되자 궁에서는 할 수 없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궁에서 나오자 비비안나는 모친과의 약속대로 곧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전의 행위를 보속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듬해에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비비안나는 강완숙(골롬바)을 도와 활동하는 한편 정약종에게 가서 교리를 배우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일 기도하고 교회 서적을 읽는 데만 전심하였으며, 죄의 그림자까지도 정성껏 피하였고,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생애를 본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점차 마음 한 곳에서는 순교에 대한 원의가 자라나게 되었다.
그동안 궁에서는 자주 의원을 보내 그녀의 병을 치료하고 다시 궁으로 데려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원이 올 때마다 병이 다시 도졌다가는 의원이 돌아가면 씻은 듯이 낫곤 하였으므로, 궁에서는 마침내 그녀의 병 고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비비안나는 마음을 놓고 하느님의 보호에 감사를 드리면서 자기 본분을 다하였고, 천주교의 모든 덕행을 닦는 데 전심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게 되자 여러 해 동안 모범적인 헌신과 효성으로 자신의 직분을 다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주문모 신부가 다른 곳으로 피신하자 비비안나는 모친 곁으로 돌아가 순교할 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는 박해가 꽤 진행되었는데도 자신을 체포하러 포졸들이 오지 않자, 『천주께서 나를 원치 않으시는가 보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가깝게 지내던 김섬아(수산나)를 체포하려고 돌아다니던 포졸들이 마침내 그녀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고, 그녀는 서슴없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압송을 재촉하는 포졸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다음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성인전에서 본 대로 박해자들에게 너그러움을 베풀기 위해서였다.
포도청에 들어가자마자 비비안나는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잠깐 마음이 약해졌으나, 이내 신심을 다잡고 『저는 공경하는 천주를 위해 목숨 바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다시는 조금도 이러한 생각을 고칠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고백하였다. 형조로 이송된 후 관리들은 그녀의 항구함에 더욱 화가 나서 다리를 몹시 치도록 하였는데, 이를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다리에서 나온 피가 이내 꽃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가는 동안 비비안나는 강완숙 등 8명의 교우들을 영광의 반려자로 맞이하게 되었다. 서소문 밖까지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수레에 실려 가면서도 그녀의 마음에는 환희만이 가득하였다. 또 사형 광경을 보기 위해 몰려오는 군중들을 군졸들이 물리치려 하자, 그녀는 『짐승을 죽이는 것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왜 사람 죽이는 것을 보지 못하겠어요』라고 하면서 오히려 군졸들을 책망하였다. 그런 다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으니, 때는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비비안나가 순교한 뒤 교우들은 한결같이, 『성녀 마르타처럼 그녀의 목에서 나온 피가 젖과 같이 흰색이었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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