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conversio)는 이전의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다시 귀의하는 일이다. 이러한 회개의 역사 중에서도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마태 3, 2)고 말한 최후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의미로 물의 세례를 준 것은 아주 유명하다.
또 우리의 박해사에서도 그 회개의 표시로 피의 세례를 받은 순교자들을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당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이 회개를 회두(回頭)로, 피의 세례를 혈세(血洗)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 39)라고 한 것처럼 이전의 배교를 갚고도 남을 완전한 구원의 길이었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손경윤(孫敬允ㆍ제르바시오)과 최인철(崔仁喆ㆍ이냐시오) 또한 신해박해 때의 배교자들 가운데서 이전의 죄를 혈세로 기워갚은 마지막 순교자들이었다.
신해박해 때 모두 배교
그 중 최인철은 형인 최인길(마태오)과 함께 일찍부터 신앙을 받아들였고, 손경윤은 1790년에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교우들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의 여파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만났을 때, 최인길ㆍ인철 형제와 손경윤은 모두 마음이 약해져 「사악한 학문(邪學)을 배워 온 죄를 뉘우친다」고 말함으로써 석방되었다.
회장직 열성으로 수행
손경윤 제르바시오는 일명 백원(伯源)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울 안국동(安國洞)의 양가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며 살았다. 배교하고 석방된 후 그는 마음을 고쳐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 결과 주문모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자 자기 직분을 매우 부지런하고 열성적으로 수행하였다.
바깥채는 술집 안채는 교리실
또 홍익만(안토니오)과 가깝게 지내면서 1799년에는 정광수(바르나바)가 벽동의 공소집을 마련하는 일을 도왔으며,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 자주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주 큰 집을 사서,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며 외교인들에게 술을 팔았고, 안채는 교우들의 회합장소요 교리실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란스러운 바깥채가 안채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형 대신 주신부 모셔
최인철 이냐시오는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을 받아들였고 형과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이러한 형제의 열심은 신해박해 때 배교하고 석방된 후 훨씬 더 배가되었다.
그러다가 최인철 이냐시오는 1795년에 형이 주문모를 모셔 들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자 정동의 집을 계동으로 옮기고 주신부를 자신의 집에 맞아들였다. 정동의 집은 바로 주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 교우들이 마련한 집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김종교(프란치스코), 황사영(알렉산델)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강습하거나 강완숙(골롬바), 최창현(요한) 회장 집을 오가며 교회일을 연락하였다.
서소문 밖에서 박해의 칼날
그러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이냐시오는 이전에 체포된 적이 있었고, 그 후에도 교회일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으면서도 결코 주신부의 거처를 대거나 마음이 약해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형을 따라 순교할 원의를 가지고 있던 그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판관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이냐시오는 다른 8명의 동료들과 함께 1801년 7월 2일(음 5월 23일) 서소문 밖에서 박해의 칼날을 받게 되었다.
회장 손경윤 제르바시오 역시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평소의 행적 때문에 밀고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먼저 이 소식을 들었으므로 아우인 손경욱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는데, 그를 체포하러 몰려온 포졸들이 집에 있던 처자들을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하고 말았다.
가족피해 우려 자수순교
숨어있던 피신처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된 이냐시오는 아우를 그곳에 있도록 하고, 자신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포도청으로 가서 자수하였다. 그리고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무서운 형벌과 문초를 받았지만, 은총의 도우심이 있어 모든 시련을 이겨낸 뒤 1802년 1월 29일(음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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