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조(羅文藻 1612~1691)는 중국인 최초의 성직자로서 중국 천주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는 것은 중국 천주교회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산 교회사연구소(소장=송기인 신부) 자료 제공으로 4회에 걸쳐 연재한다.
나문조는 1612년에 복건성(福建省) 복안현(福安縣) 남쪽의 복안하(福安河) 서안(西岸)에 있는 나가항(羅家巷)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축(李祝)과 어머니 유씨(劉氏)는 모두 불교를 믿었다. 부모의 종교로 보아 그는 일찍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문조는 18세(?) 무렵인 1633년 9월 24일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인 이안당(利安當 : Antonio de Sancta Maria)신부로부터 그레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이안당 신부는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인 여옥범(黎玉範 : Juan baptista de Morales) 신부와 함께 1633년 7월 2일부터 나문조의 고향인 복안에서 전교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나문조는 세례를 받은 뒤 곧 전교활동에 나섰던 것 같다. 그는 세례를 받은 그 해에 이안당 신부와 같이 남경(南京)에 가서 활동하였으며, 일설에 따르면 1635년에는 이신부 및 도미니코회의 고(賈 : Francisco Diaz) 신부와 함께 중국 내부에서 일어난 의례논쟁을 보고하러 마닐라에 갔다. 그는 1637년에 다른 두 명의 프란치스코회 소속 신부들과 함께 북경(北京)에 가서 탕약망(湯若望)을 만났다. 그는 북경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곧 4명의 도미니코 회원 및 6명의 프란치스코 회원과 같이 복건성의 Ting-teo라는 곳으로 가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때 복건성 사목은 예수회의 애유략(艾儒略)이 맡고 있었다. 그들의 활발한 전교활동은 불교신도들의 저항을 야기시켰으며, 그 결과 복건성에 있는 교회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나문조는 3명의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을 안내하여 마카오로 피난을 갔으나 11월 21일 영덕(寧德)에서 체포되어 23일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1640년에 도미니코회의 여옥범 및 소방적(蘇芳積 : Diez) 신부와 함께 마닐라로부터 마카오로 돌아온 나문조는 1644년 10월 10일 이신부 및 가납회(嘉拉會) 수녀와 함께 다시 마닐라로 출발했다. 심한 비바람을 만나 표류한 그들은 다음해 5월 20일에야 도착하였다. 나문조는 곧 그곳의 성 토마스 대학에 입학하여 일을 하면서 라틴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철학을 2년 반 동안 공부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