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조는 다시 복건성으로 되돌아왔다. 1647년 겨울부터 복건성의 남북을 왕래하며 전교활동을 펼친 그는 정주(汀州)에 성당 한 곳과 도미니코회 사무소 한 곳을 세웠다.
도미니코회 입회
나문조는 1650년 1월 1일에 중국인으로선 최초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련수사가 되었고, 또한 1654년 7월 4일에 사제품에 오름으로써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었다. 마닐라에 있는 화교들은 그를 위하여 성대한 축하식을 베풀어 주었다.
전쟁중에도 전교활동
나문조는 1655년 7월 초에 마닐라의 도미니코회의 지시에 따라 이기(利琦)신부, 곽락나다, 나특리 및 범래와 같이 귀국하여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수년동안 청나라 군사와 명나라의 정성공(鄭成功)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교활동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 진행되었다.
1664년에는 양광선(楊光先)의 반천주교 및 배외운동이 일어나고, 1665년 1월 4일에는 청나라 정부가 중국인의 입교를 금지하고 또한 전국의 모든 선교사들을 북경에 모아서 광동으로 보내라고 명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혼자서 전국을 사목
이로 인하여 각 성에 숨어있던 선교사들은 공개적으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문조 신부는 전국의 사목을 혼자서 도맡게 되었다. 그가 1665년 5월에 위기에 처한 중국 교회의 앞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도미니코회뿐 아니라 마닐라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도 자기들의 수도회 일을 돌보아 달라고 그에게 부탁하였다.
이 같이 1667년 전후에 각 성의 수도회 업무는 모두 나문조 신부에게 위탁되고 있었으므로 그의 활동영역은 복건성, 강소성, 안휘성 그리고 하북성까지 미치고 있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왕성하게 전교활동을 편 결과 그로부터 세례를 받은 교우는 복건성과 연해도서(島嶼)에서만 5백56명이나 되었으며, 기타 각 성에서도 약 2천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그의 성과는 선교사들이 과거 30년간 전교하면서 거둔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의례문제에 융통성 지녀
나문조는 도미니코회 소속의 신부이면서도 의례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중국 전통전례를 모두 미신으로 배척하는 도미니코회의 지침을 그대로 다 따르지 않았다.
그는 1688년 10월 3일 포교성성에 보낸 서신에서 공자를 존경하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중국 전통전례 등을 미신으로 배척하라는 명령을 엄격히 준수하게 되면 결국 성직자의 반 이상과 교우의 대부분이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며-그러할 경우 아직 어린 싹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중국 교우들은 그러한 커다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면서-의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융통성을 인정해 줄 것을 호소했다. 요컨대 의례에 대한 나신부의 입장은 도미니코회의 그것과 다르고 오히려 예수회의 의견과 가까웠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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