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수 한 그릇
3월 30일 오전 11시, 사랑의 국수집이 하루의 기지개를 켠다. 식당 안에는 기다란 식탁 4개가 놓여 있고 의자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한쪽 벽의 게시판에는 이 식당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이 식당의 이익금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를 위한 쉼터 건립을 위해 쓰이고 있고, 형편상 고국을 찾을 수 없는 결혼이민자와 이주노동자들의 고국 방문 항공티켓을 위해서도 쓰이고 있습니다.”
이주민센터 수원 엠마우스(담당 최병조 신부)가 마련한 이 식당의 운영은 인근 5개 본당 신자들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 화요일은 고등동, 수요일은 왕림, 목요일은 망포, 금요일은 화서동본당 순이다. 오늘 순번인 화서동본당 봉사자 3명이 반찬을 담으며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첫 손님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님, 이리와 여기 앉으셔. 비빔밥 셋 시킬까? 맵지 않게 해주셔. 비빔밥에 계란은 큰 걸로 올려주셔.”
단골손님의 농담에 ‘우리 집 계란은 왕란 뿐이다’하고 응수하는 봉사자 이근현(마리아·68)씨는 이제 주문 받는데 도가 텄다. 정오가 되자 화서동본당 미사가 끝나고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빔밥과 잔치국수뿐인 단출한 메뉴지만 한꺼번에 손님이 식당을 찾다보니 봉사자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자리가 비좁은 터라 모르는 손님끼리도 상 하나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든다. ‘이주민을 돕고 싶다’는 같은 목적을 가진 손님들은 금세 친해져 이야기꽃을 피웠다. 식당을 찾은 김태우(카타리나·58·일월본당)씨가 먼저 말문을 텄다.
“예전에 인도네시아에 살았던 적이 있어요. 한인본당이 멀리 있어서 어찌나 한국의 정이 그립고, 신앙에 목말랐었던지 몰라요. 저도 그곳에서는 이방인이었는데 말이죠. 이 식당, 참 좋은 일 하네요.”
같은 식탁에 앉은 김신자(로사·73·율전동본당)씨가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데 우리도 그곳에 가면 다문화 사람”이라며 “좋은 목적의 식당이라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고 가고는 한다”고 답했다.
▲ 화서동본당 봉사자 서정숙씨, 이근현씨, 최성숙씨(왼쪽부터)가 사랑의 국수집 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국수 두 그릇
오후 1시가 되자 십자가의 길을 마친 화서동본당 신자들이 식당 문을 열었다. 수원 엠마우스 다문화여성들과 인근 성바오로서원의 직원, 고단한 아침 배달을 마친 야쿠르트 아줌마,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신자들도 이곳에 들러 점심을 해결한다.
예비신자인 이복택(77)ㆍ임옥란(72)씨 부부도 사랑의 국수집에 들렀다. 기존 교우들과 허물없이 친해질 수 있는 것과 조미료를 넣지 않는 담백한 맛을 장점으로 꼽는다.
“여기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보수도 받지 않는 봉사자들이 성의껏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주시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비신자들에게 국수 한 그릇 대접하면서 선교도 할 수 있어요.”
사랑의 국수집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주민을 돕고자 하는 사제들의 노력이 컸다. 2007년, 사제 몇몇이 사비를 털고 성금을 모금해 이 식당의 전세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처음에는 홍보가 잘 되지 않고 봉사자 관리가 어려워 운영이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지역 본당과 뜻을 함께하고 난 뒤부터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준 본당 신자들을 위해서라도 사랑의 국수집은 3000원이라는 낮은 단가를 포기할 수 없다. 좋은 재료를 풍성하게 쓰다보니 남는 것이 별로 없지만 국수와 비빔밥 한 그릇에 교우들 간 친교가 쌓이고, 교회의 관심을 이주민에게 돌릴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식당이 이룬 성과는 크다.
최병조 신부는 “지역사회 안에서, 지역본당과 함께 손을 잡고 가게를 운영하니 그 효과가 더욱 커졌다”며 “시설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굴러가는데 모두가 기여했다”고 말했다.
▲ 주방이 아무리 더워도 주방장 서정숙씨의 웃음은 끊이지를 않는다.
■ 국수 세 그릇
손님을 한바탕 치러내고 난 후 봉사자들은 그제야 늦은 점심을 시작했다. 앞치마를 두른 채로 봉사자 세 명이 간단하게 비빔밥을 만들어 한 상에 둘러앉았다. 봉사하고 나서 먹는 늦은 점심이야말로 꿀맛이 아닐 수 없다.
봉사자들에게도 사랑의 국수집은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는 식당이다. 뇌수술로 쉬고 있다가 봉사를 시작하며 오히려 건강해진 이근현씨, 20년 전 따놓은 한식조리사 자격증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서정숙(루시아·57)씨, 주부의 손길로 식당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는 최성숙(사라·59)씨. 이들에게 식당은 자신을 찾게 해준 고마운 곳이자 자부심을 불어넣어주는 보금자리다.
“처음에는 갑자기 일하니까 온몸이 아파 몰래 병원에 다니기도 했어요. 그런데 일을 시작하니 오히려 건강해졌답니다. 요즘에는 일하다보면 배고픈 것도 잊어요. 봉사하는 날을 위해 일주일을 아껴 쓸 정도예요.”
손님들이 떠난 자리에 빈 그릇만이 남았다. 오늘 하루 수익은 17만6000원, 지금까지 벌었던 금액 가운데 최고 수익이다. 수원 엠마우스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최근 발안 엠마우스 필리핀공동체에 쉼터 건립기금 500만 원을 전달했다. 부활, 국수 한 그릇을 나누는 사랑의 온기가 갓 나온 국수보다 뜨겁다.
▲ 화서동본당 신자들이 국수와 비빔밥을 먹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