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앞두고 참다운 정치의 부활을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나눠본다.
■ 공동선 실현의 책임과 민주주의 회복 -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박동호 신부
국민은 모든 권력의 주인으로서 이 사회생활의 조건의 총화(공동선)를 법률적으로 구성할 300명의 국회의원을 선택한다. 당연히 지연, 학연, 사사로운 이기심 등에 사로잡힌 옳지 않은 선택으로 공동선을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죄의 구조’를 가져옴으로써 시민을 고통으로 내몰지 말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현대사는 우리의 선택이 ‘죄의 구조’를 척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교묘한 형태로 발전하는데 한몫 했음을 보여준다. 독재시대와 군부정권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도덕의 덕목은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고, 정신적 물질적 고통은 고스란히 시민의 몫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당을 지지하든, 누구를 선택하든 자유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 있는 참여를 위해서는 올바른 정보에의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 공동체의 상황과 사실들, 제시된 문제 해결책을 모르고서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대중매체를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고 여기에 정치활동, 자본, 정보기관들의 유착이 가세하고, 이데올로기, 이익 추구, 정치적 통제, 집단 간의 경쟁과 알력, 기타 사회악들까지 더해짐으로써 ‘시민의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는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양한 매체가 전하는 정보들은 시민의 노력 없이는 그 객관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대중매체에서 도덕적 가치들과 원리들은 실종되었고, 민의를 대표하는 것이기보다는 그저 돈벌이가 되는 사업으로서 특정 이익 집단을 위해 잘못 이용되고 있는 탓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416항)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가 심각하게 훼손된 현실에서 공동선 증진을 위해 참여해야 할 총선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관찰·성찰·평가·판단·실천·반성할 수 있을까?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사회의 복음화’ 사명이라고 한다. 교회의 가르침에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항구한 원리들이 있다.
이 ‘가톨릭사회교리의 기본원리’로 교회는 인간존엄성의 원리(인권신장), 공동선의 원리(사회정의), 보조성의 원리(시민의 자율성과 참여), 연대성의 원리(공동선에의 헌신),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소유권 및 시장 자유의 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꼽는다. 특히 ‘참여’는 보조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민주주의의 모든 질서를 이루는 주축 가운데 하나다.
이를 교회는 이렇게 가르친다. “정부가 어느 정도 민주적인지는 무엇보다도 시민과 관련하여 시민을 위하여 시민의 이름으로 시민이 행사하는 권한과 역할이 어느 정도 시민에게 부여되었는지에 따라 판명된다. 그러므로 모든 민주주의가 참여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간추린 사회교리 191항)
시민의 책임 있는 참여 여부는 민주주의의 생사를 가른다.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책임이 더욱 무겁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현세적 야심보다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 곧 진리를 증언하고, 구원하고, 섬기는 그 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사목헌장 3항 참조)
선택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움을 실현하는 신앙행위다. 총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택한 그들이 세상에 진리를 증언할 수도 거짓을 퍼뜨릴 수도, 시민을 구원과 해방의 길로 이끌 수도 억압과 질곡으로 내몰 수도, 시민을 섬길 수도 노예로 내몰 수도, 그리고 민주주의를 자라게 할 수도 고사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정치·선거는 신앙인의 사회적 사랑 - 성염(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성탄 후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올라가실 적에 성모님은 얼마나 흐뭇하셨을까? 지성소 앞에서 “주님, 제가 낳은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시메온은 불길한 운세를 점쳐준다. “이 아기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 34-35) 무슨 얘기였을까?
그 아기가 어른이 되어 기적을 행한다. 숨이 갓 넘어간 회당장의 딸을 살려내고, 상여에 실려가던 과부의 외아들도 살려낸다. 그리고는 장사 지내 굴 무덤에 묻혀 시취를 풍기던 라자로마저 부활시킨다. 전 국민을 경악시키는 이 기적이 매스컴에 오르자 긴급당정회의가 열린다. 종교 지도자들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에다 ‘국가안보론’과 ‘색깔론’을 덮어씌웠다. 결론은 간단했다. 나자렛 사람에게 죄가 있든 없든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낫다.” 그리고 라자로마저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 45-57). 안보론과 색깔론은 이렇게 신앙인들까지 눈멀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신국론」을 보면 인류가 두 패로 나뉜다, 각자가 품는 사랑에 따라서. 무슨 명목이든 팔이 안으로 굽는 ‘사사로운 사랑’은 지상의 나라에 속한다. 팔이 밖으로 펼쳐지는 ‘사회적 사랑’으로만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고 구원을 얻는다. 현 교황은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29항)에서 신앙인이 실천할 사회적 사랑은 다름 아닌 정치라고 선언하였다. 정치는 개떼들의 진흙탕 싸움이 아니고 사회적 사랑을 펼치는 현장이며 선거는 아마도 유일무이한 기회다.
필자가 교황청에서 대사직을 수행하던 2005년 4월! 전 인류가 그 굴뚝을 쳐다보던 시스티나 경당에서 교황선거를 하던 추기경들은 한 사람씩 투표용지를 들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심판이 그려진 제단 앞으로 나갔다. “나는 나를 심판하실 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불러 나의 투표가 하느님 대전에서 마땅히 선출되어야 할 분에게 갔음을 선서합니다.”
4월 11일, 주님의 십자가(못으로 박힌 팔은 안으로 굽지 못한다)에서 사회적 사랑을 배운 우리도 투표소로 간다. 휘장이 쳐진 기표소는 아무도 못 보니까 하느님만 내려다보시는 가운데 후보와 지지정당에 도장을 찍는다. 교회가 가르친 투표 기준은 “어느 정당이 가난한 이들 편이냐?” 하나뿐. 자신이 “XX가 남이가?”하던 지역감정이라는 집단적 이기심과 색깔론이라는 마몬숭배에 따라 행동하는지 아닌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하느님 앞에 내 영원한 구원이 그날 내가 찍는 한 표에 좌우되리라는 것이 교회의 ‘사회교리’ 같다.
■ 참정치의 부활·새 희망 꿈꾸며 투표해야- 장현숙 수녀(광주 인권평화재단·노틀담수녀회)
▲ 장현숙 수녀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날이 가까이 왔다. 이 하루를 통해 우리는 고단한 현실을 바꿀 변화의 계기를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갈등과 아픔에 두 손을 놓을 수도 있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뜻을 대표할 정치인을 선출하지만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는 우리가 이미 정치인인 것이며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와 있음을 믿고 그것을 실현하고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켜감에 있어 신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신앙은 믿음을 삶으로써 실천하는 것이고, 정치란 바로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임을 강조하며 <사목헌장>은 시작된다. 가난한 이들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회 문헌 속의 피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현실의 존재들이다. 불안한 일자리에 하루하루가 불안한 이들,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 불도저와 폭약에 아파하는 강토, 죽음조차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많은 목소리 없는 이들, 이들은 바로 내 곁에 있고 또 내가 바로 그들이다.
참정치는 이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처럼 아픈 곳은 싸매주고, 추운 곳은 덮어주며, 주린 곳은 채워줄 수 있을 때 이를 참정치라고 한다. 목소리 없는 이들의 절규를 듣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자신의 생각으로 꽉 찬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겸손함이 있을 때 참정치는 시작된다.
이제 ‘무조건’의 시대는 지나갔다. 같은 고향 출신이니까 무조건, 같은 학교 출신이니까 무조건 ….
1000원짜리 삼각 김밥 하나를 사면서도 맛과 유통기한을 따져가며 고르는 우리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 우리네 삶과 후손들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정치인을 무조건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의 사랑에 대한 글귀에서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참정치’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어떨까. “참정치는 절망을 단지 절망으로, 분노를 단지 분노로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참정치는 아픈 현실 속에서도 의미를 찾게 하고 변화를 찾아 움직이게 한다. 참정치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참정치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다.”
각 후보자의 정책을 꼼꼼히 읽어보자.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보다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는, 무조건적인 개발보다는 지구 환경을 보존하는 녹색 정책을 제시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순간 바로 당신이 참다운 정치를 일구어 가는 참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2012년 4월 11일, 나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되고자 한다.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그 여인처럼 투표용지를 들고 투표소를 찾아가 새로운 희망을 일구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마리아 막달레나가 되시길 바란다. 향유 대신 투표용지를 들고 투표소를 찾아가는 오늘날의 막달레나들. 그러면 제일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특권(!)을 누린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좀 더 나은 내일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가는 자부심을, 2012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써 가는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