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로써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성령을 받았다. 그 사실은 예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시오』(마태 28,19~20)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 견진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즉 세례의 성령과 견진의 성령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별도로 받아야 하는 것인가? 견진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변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견진에 관하여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내용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다.
1.성령에 대한 이해
우선 세례의 성령과 견진의 성령에 관한 의문점에 대하여 말한다면 마치 유기체가 모든 잠재력을 갖추고 태어나 성장해 가는동안 그 잠재력이 개발되어 충만한 성숙단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처럼 세례와 견진도 어떤 면에서는 마치 탄생과 성자의 관계에 있는 성사들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런 의미에서 세례와 견진을 (똑같이 한 분이신)성령의 줄기찬 활동으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한 사건의 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견진을 통해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이제 비로소 하느님의 선물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견진을 두번째 입문과정이라고도 한다.
결국 세례와 견진의 차이는 성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사람의 상태변화에 있다고 하겠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로써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체에 의합해서 그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되 하느님 나라의 도구가 되어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하느님의 영으로 무장되어 선교와 증거라는 이중봉사를 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활동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부당한 표현
아울러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령세례」라는 표현이 즐겨쓰이고 있는데 그 표현이 부당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일단 기존의 성령운동가들이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저지르는 잘못을 지적해보면 이렇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활동을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현상들, 예로써 이상한 언어를 말하거나 치유능력을 행사하는 현상들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어떤 결정적 계기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계기가 곧 성령의 세례라는 것 즉 그러한 현상들이 바로 성령세례를 확증하는 표지라고 여김으로써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자 그 성령의 힘에의해 활력을 얻고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새롭게 성령을 받거나 성령의 세례를 받을 일이란 도대체 없다. 성령도 한분이시요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로 성령이 마치 몇 분이나 계시는 듯, 세례가 몇 가지나 되는 듯 하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성령세례라는 말은 옳은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말을 대신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성령세례라는 말로써 표현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내용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말은 없는 것인가?
본래 성령의 활동은 자유롭다. 그분은 당신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활동하신다. 따라서 그분의 활동에 대한 감지는 그분을 충만히 간직한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감지여부는 얼마만큼 성령이 주시는 활력에 찬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만일 그분의 활동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삶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답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자신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자신안에 잠재해 있는 능력을 계발하시어 드러내 주시도록 요청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성령운동가들이 성령세례라는 말로써 밝히고자 하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이 바로 이런 의미로 그 말을 쓴다면 차라리 오해의 여지가 있는 그 말보다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체험을 부각시킬 수 있는 표현들, 가령 성령의 해방, 성령께 순종함,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생활화라는 말들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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