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읍 정법」(該邑正法). 죄가 무거운 사형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려는 판결이다.
천주교회 순교자들 가운데 지방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판결을 받는 경우에는 으레 이러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오히려 이러한 조치는 순교자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 널리 전하였고, 그 용감한 증거가 신앙의 진리를 설명하는 결과를 낳곤 하였다.
이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순매(鄭順每ㆍ바르바라)와 이국승(李國承ㆍ바오로)도 같은 날 서울에서 판결을 받고 각각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된 동정 순교자들이었다.
정순매(바르바라)는 여주(驪州)고을의 유명한 신자로 주문모 신부를 도와 활동한 정광수(바르나바)의 누이요 윤운혜(마르타)의 시누이였다. 나이 열아홉 되던 1795년 무렵에 바르바라는 오빠 부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는데,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허가(許哥)의 아내였다고 속이고 과부로 행세하면서 오빠 부부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799년에 서울로 이주한 바르바라는 오빠 집에 살면서 성물 보급 일을 도왔고, 집에서 공소를 치를 때면 언제나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또 이듬해 주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에는 더욱 열정을 발하여 순교할 원의를 나타내곤 하였으니, 이러한 마음가짐은 1801년의 신유박해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후 더욱 강한 신심의 표현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니 포도청과 형조의 형리들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엄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바르바라는 『비록 가혹한 형벌 아래 죽음을 당할지언정 오랫동안 봉행해 온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대답하곤 하였다.
충청도 음성(陰城) 출신의 이국승(바오로)은 오랫동안 순교의 어려운 길을 걸은 뒤에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용기를 얻고 신앙을 증거한 사람이었다. 소년시절 충주로 이주한 그는 열아홉 살 되던 1790년에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즉 충주에서 남한강을 따라 가다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양근 땅의 유명한 학자인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형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고향의 스승은 그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면서 온갖 궤변으로 종용하였고, 그의 부모는 혼인을 하도록 권유하였지만, 그는 모든 궤변을 쉽게 물리치고 신앙생활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1795년의 을묘박해로 인해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충주 관아에 투옥되어 모진 형벌을 받게 되자 끝까지 이겨내지 못하고 석방되었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는 계속되는 부모님의 혼인권유를 피하기 위해 서울로 이주하였다.
상경한 뒤 그는 황사영(알렉산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최창현(요한)등과 교유하면서 진리를 전하는 애덕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잘못을 자주 뉘우치면서 순교를 결심하였고, 교리 실천하는데 온전히 자신을 바쳤으며, 이내 주문모 신부로부터 여러차례 교리를 배운 다음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된 바오로는 옥중에서 고광성(高光晟)과 황 포수(黃砲手)라고 불리는 교우를 만나게 되었다.
순교자 고광성과 황포수
고광성은 황해도 평산(平山)출신으로 옥중에서 마음이 약해졌으나, 바오로의 격려를 받고는 배교를 취소하였다. 또 황포수는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를 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들의 세례명을 알 길이 없다. 이때 바오로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고광성을 격려하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절대로 배교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바르바라와 바오로, 그리고 고광성은 7월 2일(음력 5월 22일)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고향에서 참수하라는 판결로 인해 그들과 함께 순교하지 못하고 이틀이나 사나흘에 걸쳐 고향으로 압송되었고, 바르바라는 여주에서, 바오로는 충청도 관찰사가 있던 공주에서, 그리고 고광성은 평산에서 각각 참수되었다. 순교 당시 바라바라의 나이는 25세, 바오로의 나이는 30세였는데, 바오로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 공주에 매장하였다고 하나 현재 그 자리를 찾을 길은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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