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신부는 예수회원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이를 테면 나신부는 항주(杭州)의 예수회 원장인 은탁택(殷鐸澤:Prosper Intorcetta)신부를 전교에 큰 공이 있는 노선교사라고 칭찬하였으며, 이러한 나주교를 은신부는 애덕으로 후하게 대접하였다.
예수회원과 가깝게 지내
아마도 그는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에서 중국 전통전례를 모두 미신으로 배척하는 것은 중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전례문제에 대하여 탄력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각 성의 수도회 업무를 맡아 관리하면서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나신부가 전교활동에서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이룩한 큰 성과는 마침내 그에게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로 임명되는 영광을 안겨주게 되었다. 포교성성에서는 1673년에 회의을 소집하여 나신부가 주교품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를 논의하였다. 당시 중국 내에서는 각 수도회 사이에 의례문제로 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교성성에서는 나신부의 주교품을 추천할 때 나신부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주교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기 위하여 전교비용의 후원금을 포교성성에서 지불하고, 의례도 로마 천주교 예절을 봉행하도록 결의하였다.
1647년 주교로 임명
한편 도미니코회 소속의 민명아(閔明我:P. Navarrete O.P.) 신부와 로마 도미니코회의 부총장도 1673년 8월 29일과 30일에 각각 나신부가 주교품에 오를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포교성성에 진술하였다. 이에 포교성성에서는 1673년 10월2일 추기경회의를 열어 나신부를 주교로 임명할 것을 교황께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교황 글레멘스 10세는 1674년 1월 4일 칙령을 내려 나신부를 남경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교 축성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소속돼 있는 도미니코회에서 그의 주교품 수락을 격렬하게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필리핀의 도미니코회 지부장인 가덕랑(嘉德朗:Antonius Calderon)은 만약 나문조 신부가 주교품을 수락하기만 하면 곧 그를 회적에서 제명시키고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소환할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보조도 취소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가 소속돼 있는 수도회에서 이와 같이 그의 주교직 축성을 방해하고 나선 것은 그가 전례문제에 있어서 도미니코회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예수회의 적응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씩이나 주교직 고사
이에 나신부는 주교직을 고사한다는 편지를 1678년 포교성성에 보냈다. 포교성성에서는 도미니코회 총장에게 나신부가 주교직을 수락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그것도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신부는 다시 1684년 7월2일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 주교직을 수락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후 나신부의 주교직 수락 문제는 수년간 방치되어 교황 글레멘스 10세는 끝내 그의 축성보고를 받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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