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이 지나 주교 축성
나신부의 주교 축성은 1679년에 가서야 다시 현안으로 대두하였다. 즉, 교황 인노첸스 11세는 그에 관한 옛 일을 거론하면서 도미니코회 총장에게 나신부가 주교직을 맡도록 재촉할 것을 훈시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교서를 반포하여 나신부를 다시 남경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그의 주교 임명이 유효함을 확인하였다.
이때 나신부는 주교직을 순명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교황의 임명장이 아직 중국에 도착하지 않아 그의 주교 축성은 여러 해 지연되고 말았다. 그는 처음 주교로 임명된 지 11년 3개월이 지난 1685년 4월8일에야 겨우 주교 축성을 받았다.
초대 남경주교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가 됨으로써 중국교회의 신기원을 연 나주교는 1688년 8월1일에 남경에서 만기연(萬其淵), 오력(吳歷), 유온덕(劉蘊德)의 사제서품을 집전하였다. 그리고 1690년4월 10일 교황 알렉산델 8세에 의해 정식으로 남경과 북경이 교구로 분할되자 남경의 초대 주교가 됐다.
또한 그는 중국 글을 많이 알고 중국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중국 관청들과의 내왕이나 공문상식(公文常識) 등에도 모두 익숙하고. 지방 민속도 잘 이해하며,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도 아울러 받고 있는 이태리 출신인 여(余)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여 주교좌를 승계할 수 있게 하는 등 1691년 2월 27일 서거할때까지 중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요컨대 최초의 중국인 성직자로서 중국의 사정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속한 도미니코회와 갈등을 겪으면서까지 중국의 전통 전례를 존중하는 바탕위에서 천주교회의 발전 토대를 구축하고자 헌신하였던 현명한 성직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나문조의 생애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그가 조선에 천주신앙을 전파하는 일에도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영세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37년에 다른 두 명의 프란치스코회 소속 신부들과 북경에 갔을 때, 탕약망은 나문조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천주교를 전도할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 글레멘스 10세는 1674년 나신부를 남경 주교로 임명하면서 중국의 하북성, 하남성, 북경, 산서성, 협서성과 고려(朝鮮)의 사목도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 사목도 겸임
또한 1679년에 남경 주교로 임명되어 1685년 주교 축성을 받은 나문조는 남경 외에 중국의 다섯 성과 조선의 사목도 겸했다. 그리고1690년 정식으로 남경과 북경이 교구로 분할되자 남경의 초대 주교가 된 나문조는 1690년 8월 포교성성에 보낸 편지에서 성직자를 양성할 의견을 피력하면서 조선(朝鮮)과 달단을 언급하고 그곳에는 아직 전교하러 간 선교사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에 대한 천주 신앙의 전파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조금씩 준비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매우 주목되는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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